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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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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재(꽁트)


BY 박 진 2007-06-11

 

(꽁트)                 횡재


박영애


   아침 일곱 시가 조금 넘은 시간. 영숙은 늘 하던 대로 아침상을 차렸다. 추운 날씨에 출근하는 남편을 위해 따뜻한 잡곡밥에 쇠고기 국을 끓여 식탁에 얌전하게 차려놓았다. 출근준비를 마친 남편이 식탁에 앉았다. 졸음이 가득 밀려왔지만 간신히 참으며 영숙은 식탁에 마주 앉았다. 김이 어리는 식탁에는 남편과 자신 뿐이다. 아이들은 아직도 단잠에 빠져있다. 습관처럼 TV의 일기예보에 신경을 쓰며 아침을 먹었다. 이른 시간임에도 남편은 밥 한 공기를 쇠고기 국에 말아 다 비웠다. 영숙은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자동차 열쇠를 챙겨들고 현관문을 나서는 남편의 뒤통수에 대고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미끄러운 길 조심해요.”

   “응, 알았어. 웬 눈이 이렇게 자주 오는지 원…….”

  어둠을 거느린 채 중얼거리며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남편을 바라보았다. 희끗희끗한 흰 머리카락이 제법 많이 눈에 띈다. 찬바람이 ‘쏴’하고 밀려드는 현관에서 영숙은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문을 닫았다. 잠시 후 아이들도 일어나 밥은 먹는 둥 마는 둥하고 빠져나간 집안에 혼자 남은 그녀. 이 시간이 영숙은 제일 좋다. 새벽밥하느라고 부족했던 잠을 더 잘 수도 있고 집안 청소를 하고 나면 금세 말끔해지는 집안분위기도 혼자 만끽할 수 있다. 영숙은 여유로운 마음이 되어 아직도 체온이 채 가시지 않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다가 정리가 덜된 채 행거에 걸려 있는 옷들이 눈에 거슬려 ‘오늘은 옷 정리 좀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먼저 철 지난 옷들을 빼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옷들을 쳐다보았다. 계절이 지날 때마다 다음 계절의 옷을 꺼내 놓으며 철지난 옷을 들여놓곤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미처 손대지 못한 옷들이 그녀의 게으름을 꼬집듯이 여기저기 끼어있는 모양이 꼭 미운오리새끼 같다. 두툼한 겨울 외투들 사이에서 얇은 옷들을 하나, 둘씩 골라냈다. 가을 점퍼와 얇은 바지, 엷은 색 스카프까지 모두 가려내어 한곳에 모아놓았다. 그것들을 장롱 속에 넣기 위해 한 손에 서 너 벌씩 모아 쥐고 모양을 가다듬었다. 두 번째로 옷들을 집어넣으려 정돈하는데 남편의 가을 점퍼에서 손끝으로 빳빳한 느낌이 왔다. ‘무얼까?’ 궁금해 하며 이곳저곳 호주머니를 뒤지다보니 안주머니에서 하얀 봉투가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그것을 잽싸게 빼들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만 원짜리와 수표가 들어있다. 두께를 감안해 꽤 많은 액수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숙은 의아해하며 방바닥에 주저 않아 돈을 세기 시작했다.‘하나, 둘…….’ 액수는 정확히 이백 만원이었다. 여러 번에 걸쳐 보태놓았는지 돈은 몇 무더기로 뭉쳐진 경계가 흐릿하게 보인다. ‘아니 이 양반이 매일 돈 없다더니 어디서 이런 돈이…….’ 순간 영숙은 부아가 치밀었다. ‘기름값 아깝다고 웬만한 길은 걸어서 가자고하고 돈 한 푼 쓸려면 벌벌 떠는 사람이 뒷주머니나 차고.’ 영숙은 땡감을 씹은 듯 떫은 기분으로 봉투를 여며서 화장대 서랍 깊숙이 넣었다. 얼핏 불안감이 스쳤다. 20년 가까이 살아도 남편이 벗어놓은 옷 호주머니 한 번 뒤진 적이 없는 그녀가 아닌가! 호주머니를 뒤져 돈까지 꺼내고, 또 남편이 비자금을 챙기고 있다는 사실까지. 영숙은 아침 먹은 것이 체한 것처럼 속이 거북해졌다. 일단 화장대 서랍에 봉투를 넣긴 했는데 저걸 남편한테 말해야하나, 모른 체하고 완전범죄를 저질러야 하나, 도로 갖다놓아야 하나 망설여졌다. 한편으로는 ‘아니야 이건 남편의 비자금이니 없어진 걸 알아도 나에게 내색도 못할 거야.’ 하고 쾌재를 부르며 영숙은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 궁리를 했다. 마음이 복잡해져서 혼자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있는데    ‘딩~ 동’ 벨이 울렸다.   

   “나야!”

   누구냐고 물어 볼 사이도 없이 703호 여자와 706호 여자가 부스스한 얼굴로 들이닥쳤다.

   “식구들 다 보내고 심심해서……. 자기는 뭐하고 있었어?”

   “응, 그냥 옷 정리 좀 하느라고.”

   “그런데 무슨 고민 있어? 꼭 벌레 씹은 얼굴 같아.”

   “아니야, 고민은 무슨…….”

   영숙은 그들에게 남편의 비상금에 대해 말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702호 여자가 대뜸 자기 남편 흉을 보기 시작했다.

   “어휴, 어제도 또야! 이젠 그놈의 술, 정말 지겹다.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출근했어.”

   “요즘 연말이라 그렇겠지, 애교로 봐줘!”

  706호 여자의 말이다. 그녀는 셋 중에서 나이가 제일 많아서 인지 늘 이해심이 많은 편이다. 얼굴표정도 언제나 편안해보였다. 그녀들 사이에서 어떤 일을 도모함에 있어 주도권을 잡는 것도 그녀이다. 언제나 그녀가 세여자의 외출을 주선했고, 가보면 역시 가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그녀는 시장정보도 빨랐다.

   “오늘 자기들 뭐할 거야? 특별한 일 없으면 쇼핑하러가자. ○○백화점에 세     일 한다던데."

   “그래 좋아!”

   영숙은 흰 봉투의 돈을 생각하며 ‘나도 남들처럼 멋진 외투도 사 입고 근사한 곳에서 점심도 먹을 거야.’’라며 남편의 비자금 조성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 ‘혼자 아껴봐야 저렇게 딴 주머니나 차고 있는데 뭐.’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영숙의 행동에는 거침이 없었다. 문제의 봉투에서 오 십 만원을 꺼내 지갑에 넣었다. 갑자기 두툼해진 지갑이 그녀를 즐겁게 했다. 신용카드도 있지만 오랜만에 현금으로 보란 듯이 물건을 구입하고 싶었다. 가족의 행복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 자부한 그녀였지만 가끔씩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 하느라 변변한 옷 한 벌 없는 자신의 주변머리 없는 행동에 은근히 부아가 나기도 했다.

   여자들은 쇼핑준비를 위해 집으로 가고 영숙은 정리하던 옷을 행거에 걸어놓고 낡은 외투를 꺼내 입었다. 언제 산 것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외투는 색이 약간 바랬고 처음 구입했을 때의 그 산뜻한 맛이 없어졌다. 하지만 추울 때 입으면 따뜻하게 자신의 몸을 감싸주기에 코트 한 벌로  겨울을 나고 있다. 마음 속으로는 ‘어차피 공짜 돈이니 외투나 좋은 걸로 한 벌 사자는데 생각이 미쳤다. 언제나 남편과 아이들에게 유명브랜드 옷을 사주면서도 정작 자신은 시장에서 파는 저렴한 옷, 이른바 ’시장패션‘에 만족했다. 이 기회에 자신도 폼 나는 유명브랜드 외투 한 벌 장만해야겠다는 객기를 부려본다. 평소에 그녀는 남들 다 다니는 헬스클럽도 돈 생각해서 엄두도 못 내고 자꾸만 늘어가는 군살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끼기도 했다. 산뜻한 외투 한 벌로 자신의 모습이 한결 젊어보이리라고 기대를 거는 소박한 그녀다.

   낮게 가라앉은 하늘은 눈이라도 내릴 기세다. 영숙은 두 여자를 만나기 위해 아파트 현관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미리 와 있었다. 날씬한 몸매에 잘 차려입은 그녀들을 본 영숙은 웬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다. 그들은 평소에도 유명브랜드의 옷을 즐겨 입고 몸매 가꾸는데 많은 공을 들이는 편이다. 그들의 실체를 오늘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되었다. 요즘 유행하는 부츠에 허리를 묶은 외투는 세련된 이미지를 풍겼다. 영숙의 자신의 위축된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애써 큰소리로 너스레를 떨어본다.

   “어머, 다들 빨리 나왔네!”

   영숙과 702호 여자는 706호 여자의 자가용을 얻어 타고 J백화점으로 향했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 오는 백화점은 화려한 네온사인과 장식들로 화려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재래시장과는 다르게 종업원들의 친절한 서비스가 영숙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매장마다 아기자기하게 디스플레이 한 물건들이 구매의욕을 당기기에 충분했다. 훈훈한 공기 때문에 몸에 걸친 두툼한 외투가 부담스럽게 느껴질 무렵. 저만치 앞 매장에는 유독히 주부들이 많았다. ‘무얼까?’ 궁금해 하며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은 유명브랜드 상품을 ‘반짝세일’ 하는 곳으로 짧은 시간동안이지만 좋은 물건을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어 알뜰파 주부들이 서로 좋은 물건을 차지하려고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는 옆 가게 상인들의 말이다.. 30분 동안만 정상제품을 50% 활인된 가격으로 판매한다는 종업원의 귀뜀에 세 여자는 귀가 번쩍 띄었다. 손님들로 북적거리는 그곳에 세 여자도 합세해 물건을 고르느라 전쟁 아닌 전쟁을 치렀다. ‘잘만 사면 돈버는 거야’ 영숙은 마치 횡재라도 한 것처럼 마음이 잔뜩 부풀어 올랐다. 영숙은 한참을 뒤적거리다가 평소에는 자신이 없어 입기를 주저하던 A라인의 외투를 집어 들었다. 까만색이어서 그런지 입고 거울을 보니 자신이 늘 즐겨 입던 펑퍼짐한 외투와는 달리 훨씬 더 산뜻하고 젊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머, 참 잘 어울리시네요. 훨씬 더 젊어 보이시구.”

  조금은 오버하는 듯한 종업원의 칭찬도 듣기에 기분이 좋았다. 그들의 접대용 멘트이려니 생각은 하면서도 영숙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다른 두 여자들도 옷을 입고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앞 뒤 태를 살폈다. 마음에 드는지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계산을 하는 그녀들을 향해 영숙은

   “자기들 옷 다 샀으면 우리 점심 먹고 가자, 오늘은 내가 쏠게.”

   “오늘 무슨 날이야? 밥두 사구!”

   “아니야, 무슨 날은 그냥 매일 궁상만 떠는 것 같아서 기분 좀 내려고 그래.”

   706호 여자가 석연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지만 영숙은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돈이란 이렇게 사람까지 달라지게 하는 존재다. 평소에는 택시비가 아까워 여간해서는 택시도 타지 않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니는 그녀였지만 뜻밖의 횡재에 30여 만 원이 넘는 외투도 망설임 없이 ‘척’사 입고 여자들에게 멋지게 점심까지 사며 물질의 풍요함을 한껏 만끽했다. 기계에 기름이 필요하듯 우리의 생활에도 돈이 윤활유가 된다는 사실이 실감났다. 지갑에 신용카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빴빴한 신권을 꺼내 밥값을 계산했다. 평소에는 시내에 볼일이 있어 왔다가 점심을 먹게 되면 점심 값을 절약하기위해 칼국수나 김밥을 먹던 그녀가 오늘은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여자들 앞에서 목에 힘을 주며 비싼 정식을 샀다. 연신 웨이터가 드나들며 음식을 날라다주었다. 오래만의 융숭한 대접에 마치 귀족이 된 듯 기분이 삼삼해진 영숙은 후식으로 제공된 아메리칸 스타일의 커피를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집에 돌아와서도 그녀는 새로 산 외투를 걸치고 이리보고 저리보고 거울 앞을 떠날 줄을 몰랐다. 까만 외투가 무척이나 세련되어 보인다는 생각을 하며 그 옷에 맞는 헤어스타일을 연출하느라 머리를 모아 올려보기도 하고 풀어서 늘어뜨리기도 하면서 어린아이처럼 들뜬 마음이 좀처럼 가라앉지를 않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옷을 장롱에 걸고 부랴부랴 주방으로 갔다. 남편 퇴근시간에 맞추어 저녁 짓기를 서둘러야 한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고 온 남편에게 밥이라도 따뜻하게 지어주는 것이 전업주부인 자신의 본분임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년 가까운 결혼 생활에 때로는 권태를 느끼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같이 살다보면 사랑보다는 ‘정’으로 산다는 말이 와 닿을 때가 많다. 미운 짓을 할 때는 밉기도 하지만  든든하게 가족을 지켜주는 남편이 그저 미덥기만 하다.

   된장찌개가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을 무렵 초인종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날씨가 추운 요즘 남편의 귀가 시간은 거의 정확하다. 손의 물기를 앞치마에 닦으며 재빠르게 달려가 현관문을 열었다. 찬 바람 속에 남편은 서 있었다. 신발을 벗는 남편의 코가 빨갛다. 찬 공기에 핼쓱해진 남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낮에 보았던 두툼한 돈 봉투가 생각났다. 영숙은 웬지모르게 불안해져서

   “일찍 왔네요!‘

하며 다시 한 번 남편의 얼굴을 살폈다. 아무리 쳐다보아도 그 얼굴은 아내 몰래 비상금이나 꿍쳐 둘 사람이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순박한 얼굴이었다. 영숙은 괜스레 죄책감이 들어서 돈 봉투를 얘기를 꺼낼까 하고 잠시 망설였지만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 돈에 대한 출처가 궁금하기도 하고 그 돈이 쓰여 질 용도에 대해 두려움이 앞섰다. ‘혹시 남의 돈이면?’ 영숙이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리 속이 온통 엉킨 실타래같이 복잡해져 있을 때 남편이 영숙을 쳐다보며 물었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요, 그냥!”

   “원 참, 사람도 싱겁기는…….”

   영숙은  남편이 씻을 동안 밥상을 차렸다. 잠시 후 남편이 식탁으로 다가와 앉았다. 조금 전 현관문을 들어설 때보다 한결 더 말끔하고 혈색이 좋아졌다.

   “아, 구수한 이 냄새!”

   남편은 급히 숟가락을 들었다. 이젠 밥숟가락이 오르내리는 모양만보고도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지 밥맛이 없어서 간신히 먹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남편은 숟가락을 깨끗하게 빨아먹어가며 맛나게 식사를 하고 있다. 영숙은 기회를 틈타 적당한 시기에 그 봉투에 대해 말하리라 생각하면서 계속해서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을 선뜻 꺼내질 못한 채 며칠을 보냈다. 그녀가 사온 외투도 남편 눈에 띄지 않게 장롱 깊숙이 넣어둔 채로.

   일주일째 되는 날, 영숙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야기를 했다. 잠자리에 들어 아직 잠이 들지 않은 남편 옆에 누워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보~, 사실은 나~ 며칠 전에 옷 정리하다가 돈 봉투 봤는데…….”

   “뭐? 그래서 어쨌어, 설마 그 돈에 손댄 건 아니지?”

   “왜~에~ 그거 쓰면 안돼?”

   “이 사람아 무슨 돈인지도 모르면서 …….”

   “당신 비자금인 줄 알고…….”

   “이제는 남편 호주머니도 함부로 뒤지고…….”

   남편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역력했다. 아무 말 없이 화를 삭이는 남편의 얼굴을 보기가 민망해 영숙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두 눈을 꼭 감으니 금세 지옥에 온 듯 눈앞이 캄캄했다. 호랑이 같은 남편의 화난얼굴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 같아 얼굴이 근질근질했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남편은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돈 얼마나 썼는데?”

   “미안해 여보, 오십 만원…….”

   “하는 수없군. 장모님께 모처럼 큰사위노릇 좀 제대로 하려고 했더니…….”

   남편은 그 돈을 모으려고 일년도 넘게 용돈을 아끼고 될 수 있는 대로 가까운 곳은 걸어 다니며 모은 것이라고 했다. ‘매일 처남 혼자 부모님의 뒷바라지를 도맡아 하는 것이 미안해 이번에는 힘 좀 보내려고 했다’는 남편의 말이 비수처럼 그녀 가슴에 와서 꽂혔다. 작년 봄 가족들이 모였을 때 친정어머니께서 식사를 하시다가

  “아이고, 이게 뭐야?”

하시며 입에서 무언가를 꺼내시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녀는 연세가 드셔서 치아가 하나씩 망가져 가는 친정어머니를 보는 것이 안쓰러웠지만 그녀도 살기 바빠 달리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영숙은 머리 속이 하얘졌다. 남편의 비자금일거라고 미리부터 넘겨짚은 자신이 미웠다. 영숙의 머리 속에는 송곳니 빠진 어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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