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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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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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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 소영 2008-01-22

박 정 애

 

대소가 딸네들이 모였다. 고모, 언니, 60에서 80을 내다보이는 20여 년 차이를 둔 연령대다.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가정사들이 펼쳐지는 모임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부모님 살아생전 일들이 필름처럼 이어진다. 큰댁 큰 언니는 70여 년 전 어릴 적 이야기를 전설처럼 들려준다.

 

대종가인 큰댁 언니들은 사대 봉제사 부터해서 접빈객을 맞이한 어려운 시절의 어른들이 겪었던 대소사의 고충을 어제 일처럼 들려준다. 나와는 15여 년 차이라 언니와는 또 다른 세대다. 딸아이도 배워야 한다는 해방 후세대다. 언니와는 달리 드물지만 도시로 공부를 하러 간 몇 사람 중에 포함되는 영광을 안은 행운아이기도하다. 더구나 딸아이는 가정형편보다 부모님의 교육열에 따라 진학의 갈림길이 달라지는 때였다.

 

동네 복판에 초등학교가 있었기에 그 당시도 대부분이 초등학교는 다닐 수가 있었다. 개교 100주년을 헤아리니 역사가 깊은 학교다. 유독 큰댁 막내 언니만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다. 입학 시기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영부영 다음해에 간다는 게 때를 놓치고 말았다고 한다.

 

언니는 때를 놓쳐 학교 교육은 받지 않았지만 몸에 벤 일상생활은 자녀교육이 되고 시댁어른께는 칭송 듣는 효부다. 대기업에 다니는 두 아들과 교직에 몸담은 딸, 신 구 식을 골고루 습득해 가정을 이루어 사는 모습이 부럽기까지 했다. 학교에서도 배울 수 없고 돈으로도 살 수 없는 타고난 천성과 부모님을 보고 자란 자녀는 성실근면 하며 어른들을 대하는 태도가 겸손하고도 예의가 발랐다.

 

어머니와 가까이 사는 딸은 어쩌다가 언니를 찾아갔을 때 방학을 했거나 집에 머물면 꼭 인사를 하러 와 엄마를 도와 집에서 식사를 준비해 대접한다. 어느 날 언니가 자리를 비웠을 때 딸에게 물었다. “네가 친, 시댁을 이렇게 챙겨가면서 살려면 바쁜 세상에 고달프지 않느냐” 라고 물었다. 이모 말씀처럼 솔직히 처음엔 우리 친구들과 비교할 때 엄마가 나를 너무 힘든 세상을 살도록 가르치신다고 속으로 불평도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가 가르쳐 주시는 대로 행하니 사람의 도리가 어떤지를 느끼게 됩니다. 맏며느리인 질녀는 집안 대소사에 중추가 되어 앞장서서 집안일을 처리하니 시부모님과 동기간에 정도 각별하다고 했다.

 

재물을 쫓아가면 도리를 잃게 된다는 부모님의 교육을 따르는 질녀가 고맙기도 하고 사랑스러웠다. 요즈음 다 그렇지 않지만 대학교육을 받은 엄마들이 가르치는 교육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가? 기러기 아빠의 신조어가 생기고 촌수의 개념을 잊고 살만큼 가족관계는 흐려지고 있다. 요즈음 배운 계집들은 서방하고 새끼밖에 모른다는 부모님 때부터 들은 소리다. 그만큼 도덕적으로는 뒤떨어지고 있다는 소리다. 시대가 변하면 사고도 변해야한다지만 모두가 귀하게 자란 아들 딸, 살기 힘든 세상에 복잡하고 어렵게 살기는 싫다는 추세로 흘러가고 있다.

 

이혼은 이제 흉이 아니다. 맞지 않으면 헤어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딱 맞는 부부가 몇이나 될까? 본인들이야 고심하고 결정했는지는 모르지만 자식을 키우는 어미의 입장으로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기는 너무도 흔한 요즈음 세상이다. 딸이 없는 나로서는 남의 딸보다 며느리의 눈이 더 간다. 선생님인 질녀는 삼복까지 친시 삼촌, 숙모 인사하러 간다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언제 돈 모아서 살겠느냐는 나의 말에 둘 퇴직하면 연금으로 살면 되고 벌어서 아이들 교육시키면 저들도 우리처럼 살게 된다는 넉넉한 마음이 20년이나 연배인 나는 부끄러웠다. 언니가 가르친 교육이다.

 

그런데 그 언니가 가슴에 맺힌 한이 있다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얘기한다. 언니, 오빠 다 학교 가는데 왜 나만 못가느냐고 일제 강점기에 초등학교 졸업한 큰 언니와 중학교 중퇴한 둘째 언니에게 함께 가지 못하고 언니들만 공부한 것을 원망 아닌 원망을 한다. 각처에 흩어진 옛날 친구를 모두 만날 기회가 시골 초등학교 동창회다. 언니, 오빠, 이웃친구들이 모두 가는 곳에 참석할 수 없는 서러움이다. 우리가 예사로이 하는 얘기가 언니에게는 상처다. 친정 근동에 연배를 만나 어느 가문 종가 댁 막내라면 으레히 몇 회 졸업생이냐고 묻는 질문이 언니의 가슴을 내려앉게 한다는 게 한의 요지다.

 

애살스러운 언니는 졸업장은 없지만 열심히 배우고 책도 많이 읽어 상식이든 계산이든 살아가는데 지장이 없을 만큼 기본적인 지식을 쌓고 있기에 주위에 누구도 언니의 상처를 모른다고 한다. 언니를 볼 때마다 오만한 지식인보다 겸손하고 지혜롭게 사는 언니의 삶이 얼마나 중요하고 주위를 편하게 하는 삶인지를 느끼게 된다. 얼마 전 돌아가신 형부 역시 모범 가장이셨다. 아이들은 아버지 어머니가 학교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성실 근면하게 열심히 살아오신 과정을 보고 받들면서 자랐기에 교육의 효과는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람이 살면서 각자의 한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쓸데없는 일에 한을 두고 이루지 못할 일에 시간을 허비할 때도 많다. 내가 거울이 되어야 할 자식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잊고 살아 갈 때가 잦다. 언니의 한을 들으면서 부끄러웠다. 어느 대학이 언니의 교육을 능가 할 수 있을까? 부모님의 거름을 먹고 자란 아이들 역시 비바람이 치는 캄캄한 밤에도 부모님의 가르침은 삶의 전조등이 되어 목표점을 잘 헤쳐나가리라 믿어진다.

 

언니는 사랑받는 며느리, 현명한 아내, 장한 어머니였다. 언니가 어느 대학 졸업장보다도 더 값진 삶을 살아온 졸업생이다. 언니가 존경스럽고 부럽다고 하니까 언니는 과찬 이라면서 빙긋이 웃는다. 나는 나의 졸업장 값을 얼마만큼 하면서 살아 왔는가? 언니가 가지지 못한 졸업장에 한을 가졌다면 나는 졸업장 값을 얼마만큼 하면서 살았는지 반성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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