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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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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에 찾아온 짝사랑


BY 박 소영 2007-10-29

 

                              60에 찾아온 짝 사랑

                 

                                                                                                              박 정 애


              

 이곳에 이사 와서 벌써 두 번째의 가을을 맞는다. 말만 경산시이지, 수성구 시지가 인접해 있고 2호선이 연장되면 대구권에 있는 동네이다. 그런데 생활 풍습은 완전히 시내와는 차이가 있다. 문밖 엘리베이터에서부터 어른 아이들 할 것 없이 먼저 보면 인사를 한다. 집에 있으면 산이나 놀이 공원에서 만난 이웃들, 성당에서 만난 교우들이 제사 밥 먹으러 오라니 호박범벅을 끓여놨다고 오라기도 한다. 채전을 지나다 낯익은 이웃을 만나면 채소를 아깝잖게 한 소쿠리 안겨주기도 하고 과수원을 하는 이웃들은 과일을  들고 와 먹어보라니 옛 고향에 온 듯 마음이 푸근하다. 


 여독과 감기로  달포 가까이 산책을 하지 못했다. 성당에서 만난 전라도 형님이 놀러 오라는 전화를 받고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면장 댁 형님이 원룸 형님 댁으로 제사 밥 먹으러 가잔다.  칠십을 오가는 형님들, 동갑내지 한 살 위아래 이웃들 모였다하면 7~8명이다. 나이가 나인만큼 자식문제 남편문제 젊었을 때 살아온 이야기보따리가 연륜만큼 풍성하다. 오늘은 아들 딸 육남매를 남부럽잖게 잘 키워 교수로 약사로 은행지점장으로 두어 평소에 고생을 하지 않은 사람같이 인물이며 입성이 갖추어진 전라도 형님의 소회가 영화 필름처럼 풀려나왔다.


21살에 전라도 산골 동네 맏며느리로 띠 동갑인 33세에 남편을 만났다고 한다. 일찍 딴 세상을 가려고 그랬는지 많이 배우지 못한 남편은 아내를 데리고 열심히 농사일을 했고 일한 만큼 난 수익은 전답을 사모아  살림이 착실했다고 한다. 형님이 36살, 두세 살 터울에 아이들이 여섯이나 되고 막내가 두 돌이 다가올 때 남편은 위암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 어른 모시고  딸린 자식들이 올망졸망한 형님은 누운 남편의 병간호만 하고 있을 처지가 못 되어  낮이면 들에서 밤에는 사경을 헤매는 남편 곁에서 체면 없는 잠을 쫓느라 그렇게 힘들었다고 한다. ‘나 없이 어찌 살아가겠느냐’ 고 하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늘 못 배운 게 한이 되어 전답을 다 팔아서라도  아이들 공부를 시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남편의 유언이 빈 말이 아닌지 아이들은 하나같이 공부를 잘 했다고 한다. 자신은 농사일에 빠져 어느 대학에 원서를 내야하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아이와 담임이 의논해서 진학했다고 한다.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먼저 시험을 치룬 딸이 서울 명문약대에 합격해도 등록을 하지 않았다고 하신다. 아들을 공부 시키는 게 먼저 간 남편에 대한 약속이라 믿고 극구 말렸지만 독이 난 딸은 아르바이트하면서도 다음해에 또 합격해 입주 가정교사를 하면서도 4 년 내내 전면 장학생으로 졸업해 동생들 공부 하는데 적잖은 도움을 줬다고 하신다. 6명의 자녀가  대학을 졸업할 쯤에는 값이 나가지 않는 산골 전답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셨다.


 사람 사는 곳은 별다른 데가 없다고 한다.  아무리 시골이지만 남정네들 유혹도 많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당신 안 사람과 이혼 하고 내 시모님 내 자식 책임을 진다면 당신 말을 들을  것이지만 나는 내 가족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이니  가장의 위치를 흔들지 마르라고’ 하면서  유혹을 뿌리치고 자녀들이 잘 자라 주는데 혼신을 바쳤다고 한다.


형님은 늦게까지 일을 했다고 하신다. 시모님이 돌아가신 후 형님은 가사를 정리하고 상경하여 조그만 한 빌라를 사서 생활하셨다고 한다. 직업이 단단한 자녀들은 결혼도 어렵잖게 이루어졌다고 하셨다. 우직하리만큼 성실, 근면함은 자식들 만류를 뿌리치고 자신에게 맞는 일을 계속했다고 하신다.


시모님도 가시고 자식들도 제 둥지를 찾아 모두 떠난 빈방은 너무도 쓸쓸했다고 하신다. 더구나 두 아들은 미국에서 학위를 받기위해  떨어져 살아 전화로 듣는 목소리는 든든하고도 흐뭇했지만 외로웠다고 하신다. 일에 빠졌던 지난날들은 남편에 대한 애틋한 사랑도 그리움도 기억 저편에 묻어두고 살았다. 가족을 지켜야 했던 짐을 내리고 좀 홀가분함을 느낄 무렵 한 남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루어진 사랑이 아니라  짝사랑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50대의 마지막 겨울 어느 날, 그날도 형님은 병원 건물에서 청소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배가 불룩한 젊은 새댁 뒤를 따라 산부인과 문을 열고 들어오는 노신사를 쳐다보는 순간 형님은 옛 애인을 만나기도 한 듯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하셨다. 염치불구하고 노신사가 자리를 비운사이 새댁에게 엄마가 따라 오시지 않고  왜 아버지가 오시느냐고 물었다고 하신다. 5 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 혼자 사시면서 자녀들 결혼을 다 시키고 오늘도 제 친구가 간호사인 이 병원으로 운전해 오셨다고 한다. 자식들이 아버지가 재혼을 하셔서 노후를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원하고 있는데 때가 되면 한다는 말씀만 하신다면서 연신 눈물을 흘리는 딸을 보고는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은 충동이 간절했다고 하신다.


 이틀 밤을 잠을 설치면서 이제까지 남자 생각을 해 본적이 없는데 며느리 사위를 다 본 내가 무슨 망령인가 하고 달래도 보았지만 이름도 성도 모르는 그 남자가 차지하는 가슴은 지금까지 쌓아온 삶의 목표가 와르르 무너지고 그곳으로 치닫고 있었다고 하신다. 딸을 순산한 새댁은 독방을 이용했다고 했다. 병원을  왔다 갔다 하는 노신사를 먼발치로 바라보면서 새댁 혼자 있을 때 일부러 그 방에 드나들어 방을 깨끗하게 치우면서 말을 걸기도 했다고 하셨다. 나흘이 되는 날, 출근을 하니 순산을 한 새댁은 퇴원을 하고 없었다고 한다. 무엔가 놓친 듯한  기분은 온몸에 기가 쭉 빠져나감을 느꼈다고 하셨다.


용기를 내어 간호사에게 그 집 사정과 친구 아버지에 대해 물었다고 했다. 너무 좋으신 분이고 공직에서 퇴직하셨다는 말과 후한 인심을 말하기에 전화번호를 적어 달라고 하니 눈치를 챈 간호사는 “꼭 전화 한번 해보세요.” 다짐하면서 적어 주었다고 했다. 전화기 앞에 앉기를 여러 수십 수백 번, 전화번호 끝 글자를 누름과 동시에 수화기를 놓았다고 하신다. 적어준 메모지가 헤어질 정도로  손이 자주 간 종이쪽지를 한  달이 되는 날밤 촛불에 불사르고 노신사의 환상을 가슴에서 잊기로 결심했다고 하셨다.  형님은 아픈 짝 사랑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일자리도 옮겼다고 하셨다.


그 일이 있기 얼마 전 철학관을 운영하는 사촌 시동생이 아들을 보고 너의 엄마가 60이 오기 전에 바람이 한번 지나가겠다고 하더라는 말을 아들을 통해 들었다고 했다. ‘짝 사랑도 바람이긴 바람인가 보다 사주에 나타나게’ 하고는 활짝 웃으신다. 벌써 10 년이나 지난 마지막 불태웠던 사랑이 짝사랑으로 흘러 보낸 물거품이지만 세월이 지나니 이렇게 이야기 꺼리가 된다는 형님의 솔직함에 우리는 눈물을 글썽 거리면서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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