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하루가 다르게 추워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년과 달리 올해는 거실에 연탄난로를 들인 관계로 아무리 막강한 동장군이 찾아온다손 쳐도 걱정이 없습니다. 하지만 연탄난로는 시간을 맞춰 연탄을 갈아줘야 하는 정확성과 성실성, 그리고 애정이 필요한 녀석입니다.
우선 연탄불이 꺼지기 전에 시간을 맞춰 새 연탄으로 갈지 않으면 번개탄을 넣고 눈물을 쏙 빼며 연탄불을 다시 피우는 등의 악전고투를 감당해야 합니다. 요즘엔 하루에 여섯 장을 때고 있는데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그리고 새벽에도 갈아줘야 거실이 춥질 않습니다.
오늘도 자고 있는데 아내가 발로 저를 툭 찼습니다. "어서 불 갈아."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일어나 벽시계를 보니 새벽 3시를 갓 넘은 시간이었습니다. 거실로 가서 살펴보니 서둘러 연탄을 갈아주어야 했습니다. 광으로 가서 연탄을 가져다 두 장을 갈았지만 잠은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엊저녁 퇴근하면서 "배가 고프지만 살이 찔까봐 참겠다"며 그냥 잠인 든 아내가 떠올라 서둘러 밥을 짓기로 헸습니다. 압력밥솥에 쌀을 안치고 냉장고를 뒤져 일전에 사다 냉동실에 쟁여둔 바지락을 씻었습니다. 그리곤 무와 고추를 가미하여 시원한 바지락 맑은 국을 끓였지요.
아내를 위해 새벽밥과 국을 끓였는데...
맛을 보니 술국으로도 안성맞춤이며 시원한 해장국과도 같았기에 바지락 국을 푸며 냉큼 아내를 불렀습니다. "여보, 얼른 와!" 하지만 아내는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불렀지요. "00엄마, 얼른 오래두!" 그러나 역시도 함흥차사인 아내로 인해 저는 서서히 '스팀'(열)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번엔 주방을 나와 안방으로 한걸음에 달려가 버럭 고함을 질렀습니다. "밥도 국도 다 됐어, 어서 와서 같이 먹자고!"
그러자 저의 고성에 반동한 아내 역시 신경질을 잔뜩 묻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안 먹어! 졸려 죽겠는데 꼭두새벽부터 무슨 밥이야..." 순간 망연자실과 함께 새벽부터 제가 애써 만들고 지은 밥과 국이 일순 초라한 나그네의 처지로 격하되었다는 자격지심이 들더군요.
그러자 그예 평소 파르르한 부사리와도 같은 성정(性情)의 제 옹졸하고 못 된 성격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제기랄! 아무리 내가 못 났어도 그렇지, 명색이 이 집안의 가장이며 당신의 남편이거늘 다른 시간도 아니고 새벽부터 날 이처럼 마치 똥 친 막대기 취급을 해?' 부아가 활화산으로 더욱 치밀기에 뒤도 안 돌아보고 씩씩거리며 주방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제어의 경계선을 넘어버린 저는 그만 치솟는 울화를 그릇을 깨는 것으로 대신하고야 말았습니다. 먼저 김치통에 담겨져 있는 김장김치를 꺼내 조금 덜어내려 했던 접시를 들다 말고 냅다 개수통에 집어 던졌습니다. "와장창~!" 이쯤 했으면 아내가 놀라 단박에 주방으로 달려올 줄 알았지요.
'알았어. 당신이 나 먹으라고 정성으로 만든 밥과 국을 맛있게 먹어줄 게. 어서 화 풀어'라고 하면서 올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건 저의 착각이었습니다. 잠시 머뭇거렸지만 여전히 소식이 없는 아내였음에 저는 그릇을 하나 더 깼습니다. 이번엔 접시가 아닌 사기로 된 밥그릇이었습니다.
그 역시 요란한 굉음을 내며 고요한 새벽의 정적을 깼음은 물론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메아리조차 없음에 저로서는 이제 장탄식마저 흘러나오더군요. 이거야 원 손뼉도 마주쳐야만 소리가 나는 법이고, 싸움도 상대가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내가 미친놈도 아니고, 이른 새벽부터 대체 이게 무슨 황당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당신은 밥도 잘 하지만 국은 또한 나보다도 더 잘 끓여!
하는 수 없이 멋쩍은 꼬락서니가 된 저 자신이 스스로 보기에도 부끄럽더군요. 우라질, 밥이나 먹자…. 바지락 국에 밥을 한 술 말아먹고 거실로 나왔습니다. 연탄난로의 연탄불이 다시금 파란 불꽃을 내며 요동을 치기에 뚜껑을 닫고 안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벽시계의 초침은 새벽 4시를 향해 바쁜 걸음을 경주하고 있었습니다.
침대 모서리에 베개를 기대고 비스듬히 누워 리모콘으로 24시간 뉴스채널 방송을 틀었습니다. 그 순간 저쪽 벽을 보며 자고 있던 아내가 인기척을 느꼈음인지 제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 한 쪽 발을 턱 하니 제 배 위에 올리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백화점에서 늦게까지 일을 하느라 늘 그렇게 피곤을 태산으로 메고 다니는 가련한 아내입니다. 하여 습관처럼 다리가 아프다며 제게 마사지를 요구하곤 하는 아내지요.
하지만 오늘 새벽엔 그러한 아내가 왠지 그렇게 무척이나 꼴 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발을 저쪽으로 밀어냈지요. "왜 이래? 잠이나 계속해서 자. 이 잠탱이야." 그리곤 "엊저녁부터 배가 고프다기에 남편이 새벽부터 서둘러 밥과 국을 만들었으면 다만 한 숟갈이라도 먹어주는 센스는 있어야 하는데 너는 그런 예의도 없냐?"고 궁시렁거리면서 여전히 제가 퉁퉁거리자 그제서야 눈치를 챘던 탓인지 아내는 이후론 조용했습니다.
아무튼 배가 부르자 그 포만감으로 인해 저는 시나브로 잠이 들었습니다. "어서 일어나, 출근 안 해?" 아내의 목소리에 눈을 뜨니 오전 6시 20분이었습니다. 평소 6시면 출근을 시작하는 습관인지라 냉큼 일어나 욕실로 갔지요. 세수를 하고 머리를 감은 뒤엔 보리차를 마시려고 주방으로 들어섰습니다.
근데 아까는 아내가 그렇게나 치지도외(置之度外)했던 제가 끓인 바지락 국이 훵~하니 비워져 있는 겁니다. 안방으로 건너와 얼굴에 스킨과 로션을 바르면서도 아까의 옹졸함이 떠올라 아내와는 말을 안 섞으려고 작심했지요. 하지만 잠시 뒤 아내의 말 한 마디에 저는 그만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당신은 밥도 차지게 잘 하지만 국은 또한 나보다도 더 잘 끓여!" 순간 앙칼진 서운함을 담아 버럭 고함을 질렀지요. "그럼 아깐 그렇게나 불렀음에도 왜 신경질만 냈냐?" 아내가 말했습니다. "너무 고단하니까 밥보다는 잠이 더 고파서 그랬지, 뭐…." 아내의 그 말 한마디는 저의 폐부를 꿰뚫는 자객의 예리한 비수가 되어 제 마음에서 선혈이 낭자하게 했습니다.
'오늘 저녁엔 당신의 다리를 정성껏 마사지해 드리리라
'미안해! 내가 못 난 탓으로 늘 그렇게 고생만 시켜서 정말 미안해!' 하지만 그 말은 제 마음 속으로만 부르짖는 혼자만의 넋두리였습니다. "다녀올게." 배웅을 나온 아내는 오늘은 퇴근하는 대로 그간 때서 쌓인 연탄재를 가져다 버리라고 했습니다. "알았어…."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들어서는 골목길엔 여전히 가로등이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며 반성하고 다짐하면서 버스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여보, 새벽부터 어처구니없는 작태와 짜증을 부린 이 옹졸한 남편을 용서하구려. 은혼식을 지냈음에도 여전히 가난의 터널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 이 무능한 남편을 하지만 여전히 믿고 살아주고 있는 당신에게 나는 실은 늘 그렇게 잘 해 주고 싶었소. 하지만 마음과는 달리 현실은 늘 그렇게 나를 속이는 걸 어쩌란 말이오. 아무튼 오늘도 열심히 생업에 매진하리다. 오늘 저녁엔 당신의 아픈 다리를 또 정성껏 마사지해 주겠소. 사랑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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