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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골곰국손님-할머니


BY 그린플라워 2008-10-01

며칠 뜸했던 할머니께서 또 찾으신다.
"곰국 있어?"
"아니요, 지금 다 떨어졌구요, 더 추워지면 다시 끓이려고 안하고 있는데요."
"반찬이 뭐 있나?"
치아-틀니도 안 끼시고 그냥 우물우물 드시는 할머니(85세)께서 드실만한 반찬이 있을 리 없건만
그냥 해보시는 말씀이시다.
"드실만한 마땅한 반찬이 없어요."
"그럼 도라지볶음하고 시금치나물 좀 해줘. 그리고 우황청심원 마시는 걸로 두개만 사와."
"네~"

 

가게 마치고 집으로 오는 길에 들러 오려고 안 가고 있었더니 전화가 또 걸려온다.
"국하고 장조림은 있는데 나물반찬이 없어서 반찬 오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는데 언제 와?"
그렇게 늦게 저녁식사를 하시는 줄 몰랐다.
하던 일을 대충 마무리하고 종종 걸음으로 할머니댁에 갔다.
초인종을 몇번을 눌러도 문을 안 열어주신다.
그새 잠드셨을 리는 없고 삐지신 모양이다.
늘 미리 발걸음 소리 들으시고 열어주셨는데...

 

잠시 후 문을 두드렸더니 열어 주신다.
얼굴 마주하면 내 귀찮았던 마음도 할머니의 서운했던 마음도 어느새 사라지고 하하호호다.
"애들 기다릴라. 어여 가."
말씀은 그리 하셔도 사람이 그리운 할머니 속내를 모를 리 없으므로 현관에 쪼그리고 앉는다.

 

오늘은 그간 언듯 비치기만 하셨던 할머니 시앗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왔다.
자궁을 드러내는 바람에 여자구실을 못해 할아버지와 소원하게 사셨는데
몇년동안 까맣게 몰랐던 시앗이 아이를 셋이나 낳아 제일 큰애가 취학을 해야 하게 되었으므로
호적에 올려야 한다는 말씀을 들으셨단다.
대체로 이런 경우 두 부류로 나뉘게 되는데 본처가 이혼을 하고 나앉는 경우와
죽을 때까지 혼외자식까지 호적에 붙여 시앗을 괴롭게 만드는 경우가 있는데 할머니는 후자를 택하셨단다.
시아버지까지 한통속으로 맏며느리를 내치시려 했지만 고집불통 할머니가 끝내 이기신 게다.

그렇게 산지 얼마 안 되어 할아버지가 시앗이 집장사를 하다 거지가 되었다고 돈을 좀 달라고 하셨지만
그것까지 거절하셨단다.

그 일이 화로 미쳐 그리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시앗한테 어지간히 시달리시던 할아버지는 65세에 하늘로 가셨단다.
49제를 절에서 지내는데 시앗과 본처를 다 보신 스님이 그러시더란다.
"이리 훌륭한 본부인을 두고 어찌 그리 별볼일 없는 이와 딴살림이 나셨을꼬?"

할머니는 그 대목에서 허허 웃으시면서 속이 좋았던 모양이지 뭘... 그러신다.

 

훗날 며느리 등쌀에 못 이겨 그 혼외자식 셋을 재판을 걸어 호적에서 파버리셨단다.
욕심 많은 며느리들이 할머니 돌아가신 후 혼외자식들과 재산싸움으로 시끄러울 걸 미리 막은 게다.

그 시앗의 나이가 지금은 70세가 넘었을 게고 그 혼외자식들 셋은 서른에 가까운 나이들일 거라고 한다.
할아버지 생전에 뜯어낸 돈들은 홀라당 날리고 그나마 한가닥 희망이었을 상속분도 다 잃은 채 남쪽 어딘가에서 살고 있단다.
할머니는 가정과 나오셔서 교편을 잡으셨었고, 할아버지는 대학 학장까지 하셨던 분이시다.
재산도 꽤 있으셨으므로 시앗은 할아버지를 믿고 아이를 셋이나 낳았을 것이다.
여차하면 평창동 저택 사모님으로 들어앉을 수 있으리라 수많은 꿈도 꿨을 게다.

 

그 모든 걸 물거품으로 만든 할머니가 위대해 보인 날이다.
오늘 난 다시 사골을 끓이기 시작했다.
이르면 내일 저녁, 늦으면 모레 저녁에 후편을 들으러 할머니 댁에 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