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딸들의 엄마는 나와는 세살차이가 난다.
30대 후반에 들어선 그여자의 목소리는 중학교 소녀같다.
그웃음은 하얗고 밝았다.
"이제 바닷가에 가지마. 뭐야 청승맞게 혼자서."
친구를 자청한 이여자도 나를 처량하게 보는구나
처량한 인생이여!
멍하니 그여자를 쳐다보았다.
"갑갑해. 모든것이 그래서..."
말을 할수가 없다.
그여자는 내모든것을 이해한다는듯이 고개를 연신 끄덕거렸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않는 그여자의 행동
저쪽에서 그여자를 부르는 세딸들의 목소리가 섬을 울린다.
"엄~~마아~"
순간 한숨이 터진다.
그남자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앵앵거린다.
이렇게 끝나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지금쯤 나도 저소리를 들을수
있었겠지 싶어 괜히 머쓱해진다.
내가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그남자는 군대에 가려고 했다.
나이가 많아서 더이상 미루기가 어렵다고 했다.
"그래 남자는 군대에 갔다와야지".
당연하면서도 섭섭한 표정이 그남자의 얼굴에 가득했다.
그남자와 나는 각기 다른세상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전까지의 시간을 그저 술한잔으로 보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남자는 술자리에 나를 끼우는걸 좋아했다.
P대학의 그남자가 다니던 과에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에
그런자리가 썩 낯설고 불편하다거나 부담스럽진 않았다.
항상 어울리면 술한잔에 농담한마디였다.
건설적인 얘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하루는 술자리를 일찍 파하고 덩그러니 둘만 남게되자 그남자는 나에게
바다보러가자고 했다.
사방이 바다천지였기에 망설임없이 따라 나섰다.
P대학 앞의 그술집에서 광안리해변까지는 1시간10여분이 걸렸다.
좌석버스 맨뒷자리에 자리를 잡은 우리는 왠지 서먹하기만한 묘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고는 아무말이 없었는데 도착지가 다가오자 그남자는 나에게 이런말을 했다.
"나 군대가면 면회 꼭 와야한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약속도 해주지 않았다.
그남자보다 내가 더 그남자를 좋아하고 있었기때문에 섣부른 대답이 나오질 않았다.
바닷가 백사장에서 우리는 까만 밤바다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남자는 내손을 꽉 잡고 있었다. 한참동안이나
같이 있자는 그남자의 말을 뒤로한 채 얼른 택시에 올라탔다.
버스가 다 끊어진 뒤라 어쩔수 없었다.
뒤돌아 보지 않았다.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이 나역시 간절했으니까 하지만 아끼고 싶었다.
택시를 타고 오는동안 내내 내마음은 따뜻한 피가 온몸을 휘감았다.
아주 푸른 바다위를 내것인양 날고있는 한마리 갈매기가 되어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항상 웃고 다녔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참을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남자와 난 항상 통화를 했다.
금방 헤어지고 나서도 통화를 했고 자기전에도 통화를 했으며
아침을 눈을 뜨자마자 또 통화를 했다.
그남자와 난 한동안 못볼것을 대비해 남해로 여행을 가기로 했다.
나는 그남자를 위해 친분이 두터운 사람들 몇명에게 같이 가기를 원했고
그들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랫 우리 여덟명은 아직까지도 잊지못할 추억을 가지게 되었다.
"선이 엄마, 신랑이랑은 어떻게 만났어?"
괜한 질문을 한것 같았다.
표정이 흐려지는걸 느꼈다.
"그냥 나중에 얘기해주께. 그만가자"
그여자의 세딸들은 멀찍이 떨어져서 앉아 있었다.
그여자는 종종 걸음으로 그여자의 세딸들을 향해 걸어갔다.
뒷모습이 힘이 없었다.
그여자의 과거는 내과거와는 달리 슬퍼보인다.
저쪽에서 한무더기의 사람들이 저벅저벅 소리를 내며 방파제로 향했다.
짐들을 한쪽에 몰아놓고 각자가 가지고 온 낚시대들을 길게 펴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그남자의 기억에 가벼운 마음으로 내 파란대문으로 향했다.
지금은 그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외롭고 슬프지만.....
파란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엄습해오는 고요함에 맥이 풀린다.
하얗다 못해 파랗게 시린 창호지발린 방문을 열고 들어가
이불도 펴지 않은 맨바닥에 누웠다.
그때의 기억들이 가물거리지만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되새긴다.
왜 좋은 기억들은 자꾸만 잊혀지는 걸까?
빛바랜 사진처럼 희미해져 가는 그남자의 웃음소리가 천장에서 맴돈다.
민박집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내외분만 계셨다.
자식들은 도시에서 늙은 노부부는 시골에서 자식들만 보고 계신것 같았다.
우리 일행을 보더니 손자생각이 많이 나신다며 무척이나 잘해 주셨다.
우리즞 늦게까지 자고 일어나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 바닷가와 근처 산을
배회하고 저녁이 되면 어수선한 저녁을 낄낄대면서 먹고 마지막으로는 술잔을 돌렸다.
촛불을 켜고-그때는 왜그렇게 촛불 켜놓는 것을 좋아했는지 모르지만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면 친구들의 진지한 모습과 행동들을 자세히 알 수 있게 된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그들은 항상 하는 진실게임이란것을 하자며 자리정리를 했다.
정말 싫은 게임중의 하나다. 나에게는
은근슬쩍 눈치를 보다가 슬며시 밖으로 나왔다.
군데군데 켜진 조명등이 무색할 정도로 달빛이 밝았다.
그자리가 싫어 나오긴 했지만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골목골목을 배회하다가 다시 민박집으로 향했댜ㅏ.
방에서 새는 촛불빛이 창문에서 춤을 추고 있었고 방안에서는 조용하다가도
웃음소리가 간간히 새어나왔으며 침울한 듯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방문을 열면 모두가 하던일을 멈추고 일시에 나를 쳐다보겠지
부담스러운 생각에 마당으로난 큰 창문 밑에 주저 앉았다.
아무나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주위가 조용해지자 안에서 하는 말소리가 잔잔히 들렸다.
"나는 솔직히 엄마, 아빠가 이혼한뒤로 동생하고 할머니랑 사는데 요즘 좀 그래".
밝은 목소리가 퍼진다.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된다는건 때론 슬픔일 수가 있다.
그 밝은 목소리를 가진 여자의 현실은 돈이라는 놈때문에 힘이든 모양이었다.
"유학을 가라는데 정말 가기 싫네.
거기가서 내가 뭘 하겠냐? 공부에 취미도 없는데.....".
그남자의 절친한 친구 목소리였다.
공부에 취미는 없다지만 내가 보기에 굉장히 똑똑한 사람인것 같았다.
고민들을 돌아가면서 얘기하는 모양이었다.
몰래 숨죽여 듣고 있자니 제법 재미있었다.
"군대를 가야하는데 여자친구를 두고 가자니 걱정이 좀 된다.
니들도 그렇고 보고싶을텐데 많이.....".
그남자였다.
날두고 하는 소린가
가슴이 콩닥콩닥 방망이질을 시작했다.
그 소리가 방안까지 들릴것만 같았다.
방안에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한걸까?
왜 웃는거지
얼굴이 불그락 거린다.
아무도 뭐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서 안절부절이었다.
얼마가 흘렀을까 누군가가 어깨를 툭 쳤다.
도둑질하다 들킨것보다 더 놀랐다.
숨이 잠시잠깐 멈춘듯 했다.
"너 뭐하냐. 혼자서..".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휴우 한숨이 절로 터져나왔다.
유학문제가 고민인 친구였다.
"어, 그냥... 화장실 갔다가..."
그남자의 친구인 그는 의리파였다. 남자들 사이에서는...
맥주를 사러 간다면서 같이 가자고 했다.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힘없이 따라나섰다.
괜한 농담만을 마구 쏟아내는 그친구와는 달리 내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잘해라. 마음이 싱숭생숭 한가본데 니가 좀 잘 챙겨줘라".
진지한 말소리가 들렸다.
"뭘"
"알아들었으면서 뭘 그러냐".
나를 보고 피식 웃는 그친구의 모습이 너무도 다정해 보였다.
"................"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친구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니 그게임은 끝냈는지 자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잘사람은 자고 술더 마실 사람은 이리오고.."
그친구는 정리를 잘한다.
자기 주변의 여자정리를 잘 못해서 그렇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웠다.
잠이 오질 않았다.
자꾸만 앞서가는 상상들이 날개를 편다.
부끄러운 생각과 그렇게 됐으면 하는 생각이 겹친다.
문득 눈을 뜨니 새벽6시 30분이 막 지나고 있었다.
엉거주춤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잔다고 정신이 없었다.
10여분을 그남자 자는 모습을 쳐다보다 조용히 나왔다.
바닷가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바닷가는 참으로 고요하고 쓸쓸한 것 같았다.
햇빛이 잘 드는곳에 앉아서 바다를 물끄러미 쳐다 보았다.
저것이 물안개라고 하는 건가
신비한 기분이 들었다.
생전 처음보는 너무 아름답고 멋진 광경이었다.
하얗게 수면위로 피어오르느 물안개 저쪽편에서는 햇빛에 반짝거리는 바위들이
조금씩 일어나고 있었다.
갈매기 한마리가 바다위를 낮게 날면서 맑은 울음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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