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달에 세번정도 세상에 나간다.
처음엔 한달이고 두달이고 나가지 않았으나 이 섬에 적응하면서 부터
열흘만 지나면 꼭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비누도 필요했고, 샴푸도 필요했고, 생리대도 필요했으며, 우유도 필요했다.
날씨로 인해 배가 뜨지 않는 시간과 나가느 시간이 겹쳐져 세상을 못볼때면
불안한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이 섬에 온지 석달째 되던날 그 남자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아무말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그 다음날에도 전화가 왔었고
또 그다음날에도 전화가 왔었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을 아무말없는 전화가 오더니 팔일째 되던날
드디어 전화기는 말을 토해냈다.
많이 보고 싶다고.... 우는것 같았다.
무덤덤히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속마음은 소금한주먹을 삼킨듯이 따끔거렸다.
10여분이 지나자 그 남자는 나에게 자기를 잊고 편안히 잘 살라고 했다.
딸깍하고 끊어지는 전화기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나를 내리쳤다.
그날은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만나야 할까 아니면 그남자 말처럼 잊어버려야 할까를 두고 고민했다.
처음에 먹었던 마음들은 파란대문에 걸쳐놓은 듯 저멀리서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수천번 아니 수만번을 생각해도 답이 나오자 않는 문제였다.
하지만 난 의지가 강하지 못한것이 항상 흠이었다.
이틀을 고민끝에 난 마음을 정했다.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마음 먹었는데...
역시 난 나의 우유부단함이 나를 망치고 있었다.
무작정 배를 탄 나는 약속은 없었지만 그 사람을 볼 수 있을거라 믿고 있었고
그런 나자신이 한심스러웠지만 마음은 설레고 있었다.
그남자와 처음 만날때처럼
하지만 그사람은 항상 그자리에 있진 않은것 같았다.
이틀을 흔들거리다 돌아왔다.
또 보름을 끙끙거리다가 다시 배를 타고 세상에 나섰다.
나갈땐 기쁨이 잔잔했으나 돌아올땐 슬픔만이 흘러 넘쳤다.
그남자는 어디 간 것일까?
수화기를 통해 흐느끼던 그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데....
습관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들어주려 하지 않지만 난 변명하고 싶었다.
닫았던 마음을 열어준 건 내가 아니라 그남자의 흐느낌이였다고
그남자를 처음 만난건 세상에 속해 있지만 속하지 않았던 때
그러니까 11년 전쯤의 여름날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떨어진 뒤 직장생활을 하기위해
학원에 다닌적이 있었다.
병원에 가면 온세상 사람들이 다 환자인것처럼 느껴진다.
학원 역시 이세상에는 대학에 떨어진 사람들밖에 없는듯 보인다.
절망감만이 가슴 한가득이었을 때였다.
좋은 사람들과 나쁜사람들과의 구분이 모호하던 그때 학원생활이 점점 익숙하기
시작할때쯤 이상한 남자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조용한 성격인것 같지만 강단이 있었고 수줍어 하는듯 하면서 할말은 다하는
아무튼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그당시 그남자는 따로 마음에 둔 여자가 있었는데-그땐 별관심이 없어서
그 여자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그 여자가 그남자를 많이 싫어 했다고 한다.
그래도 꿋꿋이 밀어부치는것 같더니 학원이 끝날때쯤 그러니까 그다음해 2월경 정도인것 같은데 그남자는 그 여자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고 했다.
이유는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여자입장에서는 가난하다는 것이 많이 걸린 모양이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도 현실감이 충만한 여자였던것 같았다.
그남자는 학원을 수료한 뒤 군대를 갔다고 했다.
그러고는 그모든것들을 잊고 지냈다.
나는 직장생활을 2년 넘게하다가 마음을 바꿔먹고 입시공부를 시작했다.
어렵고 고될줄 알았는데 의외로 재밌었다.
모든일은 어떻게 마음을 먹는냐에 따라 180도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가고 대학생활을 시작하고 처음 겨울이 왔을때
나는 나이가 동기들보다 많다는 이유로 온갖일들을 도맡아 했다.
미팅주선, 엠티알선, 일일찻집 등등
동기들은 남학생들에 목말라 있었는데 여학교여서 더욱 그런것 같았다.
나역시 그랬지만 항상 예외였다.
그저 주선과 마무리만이 나에게 떨어진 일들이었다.
그런 일들로 나는 항상 바빴다.
어떻게든 줄을 만들어 놔야 했기때문에 싫어도 좋은척 별로 친하기 싫어도 친한척
가면을 수시로 써야 했다.
그러다 P대학에 갔을때 만났던 한무리의 남자들 틈에 그남자가 있었다.
처음엔 아닌줄 알았다.
너무 많이 달라져 있었다.
피부도 많이 검어져 있었고, 머리모양은 날렵했으며, 건강한 웃음이 입가에 항상 머물러 있었다.
2년전의 그 융통성없고 강단만 있는 남학생이 아니었다.
그역시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주 당연히도....
그당시 그남자에게는 그 여자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나는 우선 내가 목적한 바를 이룬후에야 그남자에게 말을 건넸다.
기억을 되살려주자 신기하다는듯한 미소를 머금은 후 나에게 반갑다는 악수를 청했다.
도리에 내개 고맙다고 말하고는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이 두번째 만남이었다.
나는 학원에서의 그 여자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싫어할 것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암튼 그당시의 인상과 지금의 인상은 천지차이었다.
멋있게 변한 모습이 왠지 호감이 느껴지고 마음이 설레는것 같았다.
그남자를 다시 만난건 3일쯤 후에 엠티건 때문이었다.
우리는 엠티보다 서로에 대해 많은 질문과 답을 했다.
그남자는 학원을 끝내고 군대에 간것이 아니라 2개월여를 폐인으로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그런 자기의 모습을 보고 잔소리만 늘어놓던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고 했다.
엄마가 원하는건 뭐든 해주리라 맘먹고 첫번째 소원을 물었을때 엄마는 아들이
대학을 가기를 바란다고 했단다.
그남자는 지금 2학년이었다.
우리는 동갑인데다가 학원동기에다가 뭐 이런저런걸 끌어다 붙여서
친구란걸 해보기로 했다.
서로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거라 믿으면서
그남자와 자주 만나다보니 P학교에서 지내는 날이 많아졌다.
그남자가 다니는 과에는 여학생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무 보잘것 없는 나에게도 관심을 보이는 남학생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군대갔다가 온 복학생중 한명이 나를 꽤 좋아했었던 모양이었다.
그남자는 나와의 친분을 내세워 그 형에게 미팅을 약속해주고 몇가지의 댓가를 얻곤했다.
그래서 만나게된 그 복학생 형은 아직까지도 나에게 가슴 쨘한 느낌을 갖게 해주었다.
체격은 크고 건장했으나 맘은 한없이 여렸다.
군대까지 갔다왔음에도 대범하기는 커녕 잔잔했으며 무척이나 시골스러웠다.
나를 이뻐해주는 것에 너무 자만했음을 지금은 느끼지만 그때는 잘알지 못했다.
그 형이랑은 3개월정도 가깝게 지냈으나 인연은 아닌듯 했다.
처음엔 신기하고 재밌던 그의 행동들이 시간이 좀 지나자 창피하다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그남자를 만나러 출석도장을 찍던 P대학을 그 복학생 형으로 인해 발걸음을 끊게 되고
점점 모르는 사이에 서먹하게 변해갔다.
거기까지였다.
복학생 형의 적극적인 무언가가 있었다면 아마 지금 여기서 파란대문과 눈싸움을 하고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로인해 그남자가 우리학교로 출석도장을 찍게되었다.
아마도 관심있었던 여학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전히 그부분에서는 말을 아꼈고 나 역시 주선해 주려고 애쓰지 않았다.
그남자와 난 친구였지만 그남자가 다른 여자와 만난다는 것이 조금은 서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주 보면 정이 든다고 했던가 내가 2학년 봄학기를 마감할 즈음에 그남자는 나에게 뜬금없는 소리를 했다.
"우리 이번 여름방학에 남해에 여행갈까?"
진지하면서도 농담섞인 그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럼 애들 모을까?"
내가 한말이지만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임마,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만... 어때?"
빤히 쳐다보는 그남자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러는 내행동이 재밌었는지 자꾸만 나를 당황하게 했다.
"둘이서만? 왜?? 재미없을텐데..."
더듬더듬 말을 이으려니 얼굴이 불타오르는듯 했다.
그 남자의 마지막 대답이 가관이었다.
"너 나한테 시집올거쟎아. 그러니까 미리 신혼여행 연습해두는셈치면 어때?"
휴우 하늘이 노랗게 변했다.
나도 모르는 내마음을 그남자는 알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날 놀리는 것이 재미있어서 였을까?
어디까지가 농담인고 어디까지가 진담인줄 알수없었다
그런데도 화가 나거나 불쾌하기는 커녕 이렇게 마음이 설렐수가 없었다.
마음이 설레고 행복하다는 느낌이 이런것이었을까?
처음으로 느끼는 기분이었다.
이런 감정이 사람을 지켜주는 힘이 될수도 있다는걸 그때는 몰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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