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땐 나보다 더 이쁜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나보고 그랬다. 못생긴 아이라고 나를 놀려 대었다.
우선 얼굴을 애기하자면 다섯살 때 심하게 홍역을 앓아 그 흔적으로
얼굴에 주근깨가 다닥 다닥 열렸다.
안 그래도 피부가 검은데 거기에다 검정 주근깨가 도배를 했으니 볼 만했다.
어렸을 땐 내 별명이 말괄량이 삐삐였다.
이 주근깨 때문에 난 당근을 많이 먹었다.
누가 그러는데 주근깨는 당근을 많이 먹어야 없어진다고 그래서
어린 마음에 무우 먹듯이 당근도 무지 많이 먹었다.
그렇게 습관이 되선가 지금도 토마토. 당근 , 미나리는 지천으로 냉장고에 넣고 먹고 먹는다. 갈아서 먹기도 하고, 토마토도 약간 뜨거운 물에 삶아 껍질을 벗기면 잘 벗겨진다.
껍질은 팩으로 사용한다. 그냥 얼굴에 척 갖다 붙이면 그만이다.
몸무게에 대해서도 다른 아이들은 그랬다. 나보고 삐쩍 말라가지고 볼 품이 없다고
얼굴 못생겨, 키도 작아, 그러니 별 볼 게 없다고 했다. 나도 봐 달라고 사정은 안했지만
별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내 키에 내 몸무게는 표준이었다. 나에게는 내가 걷기에 불편한 무게를 못 느낄 정도의 무게만 있으면 되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나를 보더니 무슨 비법이 있냐고 다그친다.
그렇게 시커먼 주근깨는 어디로 갔느냐? 혹시 성형외과에 갔었냐? 너 점뺐냐?
마른줄 알았더니 세상에 날씬한 몸매다. 어디서 운동하느냐? 요가는 하냐?
주름살을 예방하기위해서 무슨 화장품을 사용하냐?
돈은 얼마나 많이 모았느냐?
보험회사를 다니니까 재테크도 잘하겠다. 나만 살짝 알려주라...
이런 질문외에도 공개하지 못하는 것이 부지기수다.
나도 세상을 산다고 살지만 그들이 말하는 원하는 비법은 없다.
어차피 사십먹고 오십먹는 나이처럼 늙어가는 것은 순리다.
돈도 나 살동안 불편함 없으라고 만들어진 도구의 일종이다.
내가 사용 안하면 쥐죽은듯이 꼼짝 못하는게 아닌가.
먹는 것도 내가 먹을 만큼의 양은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
단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서 채우는 것보다. 돈처럼 사용하듯 적당한 식사는 축복처럼 받아야 한다. 그래선가 절간에 가면 한 톨에 밥알의 생명을 그렇게 신주단지 모시듯 하나보다.
뭘 그렇게 잔뜩 챙겨 놨냐고 자꾸 물으면 귀찮아진다.
우리가 살아서 기껏 나누어야 할 대화가 너무 시시하다.
이렇게 시시하게 살면서 아주 사소한 일상을 열거를 안해도 우리는 몸으로 매일 오늘을 입는다. 아파트 분양광고를 보니 주부가 호텔같은 곳에서 주방 없이 아주 고상하게 사는 모습을 부각시켜 놓은 걸 보니 그 쪽 동네는 공기도 아주 비싸게 사서 마셔야 하는 것 처럼 보인다.
주부라면 여자 남자 분류 할 필요없이 누구를 위하여 밥을 해주는 역활이다.
사람을 살리는 역활,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과 같은 역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자신의 생활을 별로 느끼지 못한다. 별 거 아니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 하루들이 뭉쳐 지금의 내가 있다.
아주 중요한 내가 나날이 더욱 살아나라고 오늘을 얻은 것이다.
이렇게 시시한 비결이 길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것들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이젠 숨겨진 지도를 들여다 보아야 한다.
난 오늘도 미나리 꽝에 소쿠리들고 간다. 푸름을 먹는 날이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