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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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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 아저씨의 연애 이야기


BY 해피앤딩 2005-09-22

 

      <방앗간 아저씨의 연애 이야기>


우리 아랫동네, 양지마을 방앗간 아저씨는 올해 나이 79세이다.

호리호리한 몸매이지만, 나이치고는 꽤 정정하시다.

젊은 시절에는 면사무소 서기를 하셨다는데, 글자깨나 읽을 줄 아시니, 외지에 나가있는 옛 상전 면장 댁의 선산도 관리하고, 가끔은 토지 매매의 중개료를 챙기신다.

내가 이곳에 온 7~8년 전에, 이 동네, 저 동네, 이 산, 저 산 어슬렁대다가 아저씨를 만났다.

아저씨는 낯 선 얼굴에 대뜸 관심을 보이셨다. 

내가 윗마을 우물가 집을 사서 주말에만 온다고 했더니, 소식에 밝은 아저씨는 잘 아는 척하셨다.

“아, 그러잖아도 수영이네 집이 대전 분한테 팔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지요.‘

얼마에 샀느냐고 해서, 얼마에 샀다고 했더니, 아저씨는 내가 바가지를 썼다고 혀를 끌끌 찼다.

내가 터무니없이 비싸게 샀다는 말을, 이미 동네사람들에게서 두루 들었던 터라 새로운 사실이 아니었다.  어쨌든 내가 깍듯이 하는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서먹서먹해 하는 시골 남정네들과는 달리 방앗간 아저씨는 스스럼없이 나와의 대화를 즐기시는 눈치이셨다.

그 후 가끔, 시골 주말산책길에 만나게 되면, 아저씨는 이런저런 동네 소문을 들려주기도 하고, 농사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신문에 나오는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나에게 자신의 비밀스런 연애 이야기를 하시게 되었다.

평소와는 달리, 깔끔하게 이발을 하시고 빨간 마후라를 목에 매시어 한껏 모양을 부리신 아저씨를 보고 내가 놀라자, 아저씨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털어 놓으셨다.

얼마 전, 장날에 나갔다가 읍내 다방 부엌에서 일하는 아주머니 한 분을 사귀셨단다.

그 아주머니를 보고, 아내가 죽은 후, 꼼짝 않던 거시기가 서더라고 아저씨는 얼굴까지 살짝 붉히셨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의 얼굴이 한결 윤기가 나고 행복해 보였다.

“잘 됐네요, 아저씨.” 10년 전, 갑자기 상처를 하고, 무척 외롭다고 하소연 하시던 게 생각나서 한마디 거들었다.

아저씨는 묻지도 않는데, 자신의 연애담을 시시콜콜 들려 주셨다.

가슴에 혼자 담아 두기에는 벅차셨던 모양이었다. 외지에 나가있는 다섯 자녀들에게는 누구 하나 털어놓기가 쑥스럽고, 동네 사람들에게는 함부로 소문내기가 신경 쓰이실 것이다.

외지인인 나는 그런 면에서는 안심할 수 있는지, 시골 이웃들이 내게 자신들의 비밀스런 사연을 털어 놓는 경우가 가끔 있다.

왜 우리도 그런 심정이 될 때가 있지 않은가. 길가다 우연히 만난 생판 모르는 나그네에게, 친구에게도 차마 주저했던 가슴속 아픈 사연을 풀어내고 싶은.

몇 주를 거르고 갔더니, 방앗간 아저씨가 윗마을로 나를 찾아 오셨더라고 이웃집 아저씨가 전해준다.

그 아저씨가 나를 찾아올 만큼 언제, 어떻게 친숙해졌을까 의아한 표정이다.

산책길에 아저씨의 페허(?) 같은 방앗간에 들렀다.

시골에서는 방앗간 집이 부자에 속하겠지만, 아저씨의 방앗간은 오래전에 벌써 그 기능을 멈추어 낡고 녹슨 기계들이 고물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마을 초입 길 가에 대문도 없이 초라하게 서 있는 아저씨의 거처는 움막과 다름없다.

첫 날 밤, 아저씨의 애인이 이 곳에 멋모르고 왔다가 속으로 질 겁을 했을 것 같다.

그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나야 알리 없지만, 여자인 내가 생각하기에 아저씨는 무엇보다 우선 이 거처를 변신시켜야 연애를 동거로 바꿀 수 있으리라.

오랜만에 나타난 나를 보고 아저씨가 십년지기 마냥 반겼다. 그동안 입이 근질근질 하셨던 모양이다.

연애는 아직 진행 중이라, 아저씨는 그 간의 사정을 들려주었다.

아저씨는 소유하고 있는 논과 밭에서 먹을 양식을 그럭저럭 수확하지만, 용돈은 시집 간 딸들과, 요즘에서야 경제적으로 피기 시작한 큰아들이 가끔 챙겨주는 처지이다.

딸들이 십 만원을 보내오면, 아저씨는 신바람을 내며 읍내로 가서 맥주를 들이 키고, 새로 사귄 애인과 여관에 가서 짧은 열정을 살리고 오신다고 했다.

“아저씨가 한결 젊어 보이시니 좋네요. 그렇지만 너무 빠지지는 마세요.”

아니나 다를까, 아저씨는 그때그때 수확한 농작물을 애인한테 갖다 주었다고 했다.

고추 열 근을 주었고, 얼마 전에는 돈 50만원을 애인 통장에 송금했단다. 그 아주머니의 아들이 감옥에서 나오는데 필요하다고 해서 도와주었더니, 그녀의 아들이 고맙다고 전화를 했더란다.

왠지 내 직감이 들어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아저씨가 회춘의 대가를 즐거이 치루고 계시다면,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닐 것이다.

아저씨는 애인과 여관에서 정사를 치룬 후에는 꼬박꼬박 온라인으로 돈을 부친단다.

매춘의 냄새가 짙다. 그 여자는 유흥가의 퇴물이 아닐까, 씁쓰레 했다.

더 이상 관심을 꺼 버리고 몇 달이 지나, 나는 아저씨의 행색이 다시 추레해진 것을 알아차렸다.

아저씨의 목에서 빨간 마후라가 어느 사이 사라져 버렸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오는 권태와 지루함이 아저씨의 몸 전체에 나른하게 걸려있다.

아저씨의 헐렁한 바지가 밑으로 쳐져, 얼룩무늬 팬티가 많이 드러났는데도 아저씨는 개의치 않는다.

아저씨의 상처를 건드릴까봐, 모른 척 나는 애꿎은 날씨 이야기만 한다.

아저씨는 더 이상 자신의 연애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아저씨의 연애는 막을 내렸나 보다.

제 자리로 돌아 온 아저씨가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서글프다면 서글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