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컴에 다시 글을 쓰게 되기 전, 그러니까 2월 중순이 다 지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일찍 가서 자리잡고 앉은 예배당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전 도서관에서 잠시 자리를 맡아 놓으려고
가까운 서가에 가서 처음 눈이 닿는 곳에서 꺼내들었던 책이었습니다.
대충 머리말을 읽고 첫번 째 챕터를 몇 장 읽어내려가는데…
어떤 대목이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문득 저자가 궁금해졌습니다.
표지로 돌아가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엔 낯선듯 그러나 곧, 친숙하게 다가온 이름 석자 앞에서… 단 한 학기 동안의 만남이었지만 ‘존경’이라는 단어없이는 떠올릴 수 없는 노 철학자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분의 영상과 겹쳐져서 읽혀져서인 것인지,
이제… 글자 하나하나가 내게 가지게 된 영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그 일부를 약간의 변형과 나 자신의 ‘반성’을 더해 옮겨 보겠습니다.
누가복음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세 가지 시험을 받으신 일에 관한 것이 그 글의 배경입니다.
첫 번째 시험… 이 돌들을 명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여 우선 굶주림을 해결하라.
당시 경제적인 빈곤은 어디에나 있었다.
당시 신앙적 전통을 빙자하여 로마의 세력과 공존하는 종교지도자들은
어느 부유층 못지않게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엄격한 종교적 규례는 잘 지키는 척하고 있었으나,
가난한 소시민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물질적 풍요로움에 젖어 있었다.
굶주림을 면하는 것.
인간의 존엄성과 관련되는 이러한 요청에 일단은 순응하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이 가진 현실이다.
그에 대해 예수는 “기록하기를,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고 대답했다.
떡을 부정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고 떡의 문제를 그 뒤로 돌린 것이다.
---- 풍족함을, 어쩌면…. 마음껏… 누리고 살 때는 알지 못했습니다. 나 자신이 ‘떡’으로 대표되는 ‘물질’들에 얼마나 큰 가치를 두고 있는 존재인지… 나는 그 풍족함이 어쩌면… 영원히 계속될 줄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순간 휘장이 벗겨지듯 벗겨지고 상대적으로 느끼는 ‘결핍’이 시간과 함께 누적되자, 어느 때부터인가 물질에… 아주 작은 것에조차… 사로잡혀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나’에 대해 그 부분을 읽어내려가는 순간 보다 뚜렷하게 바라보며 ‘인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에 따르면, 역사의 긴 안목으로 보았을 때 경제문제를 해결짓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명백히 토로했다.
두 번째 시험… 예수를 이끌고 높은 산에 올라가 순식간에 천하 만국을 보이며,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이것은 예수뿐만이 아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겪은 인생 최대의 시련이다.
사람들은 가난에서 풀려나면 권력, 지위, 명예를 찾는다.
또 그것들을 가지게 되면 경제적 혜택 또한 쉽게 따르는 법이다.
심지어 종교 속에서도 권력, 지위, 명예를 위해 암투와 음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그것을 떠나서 살 수 없고,
사나이의 일생은 거기에서 평가되고 결정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악마는, 너도 그 사회에 동참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강하게 권유하는 것이다.
악의로 해석하지 않아도 그런 유혹은 누구나 받는다.
‘내가 교장이 되면 더 참신한 교육을 할 수 있는데’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 교육자가 어디 있겠는가.
국정을 바로잡기 위해 장관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려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큰 교회나 교단의 책임자가 되면 하나님의 교회에 더 크게 봉사하며,
주교가 되면 평신도로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전도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악마의 유혹은 언제나 어리석지 않다.
상대방의 생각이 높을수록 그 위치에 맞는 문제를 꺼내는 법이다.
아홉을 거부하다가도 하나를 긍정하면 그 시험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 시험은 처음 것과 달랐다. 악마에게 절을 하면,
즉 권력, 지위, 명예 등의 어떤 권위를 인정하면, 정신적 복종만 하면 그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시험을 받고 있는 예수의 지금 위치는 어떠한가.
이름없는 소시민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지금 같은 위치에서 하늘나라를 위해 전진한다는 것은
맨손으로 태산을 옮기려는 것처럼 무모한 일이다.
누가 날 따르며, 어떤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인가.
어떤 권위를 가져야 일을 할 수 있고, 추종자가 생기고 일의 성취를 기약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이에 대한 예수의 대답은 간단했다.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모든 권위는 하나님께만 있으며, 홀로 그 분을 섬길 따름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지상의 나라를 원했다면 악마와 타협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시적 세속적인 나라의 건설에 있었다면 말이다.
그러나 그가 염원하는 나라는 지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인간적 노력으로 쌓아올릴 수 있는 건설과는 다르다.
하나님의 뜻에 의해 하나님께 바쳐질 나라였던 것이다.
그것은 로마의 권력이 아니라 나사렛 마을의 빈민들 속에,
권력의 그늘에서 희롱당하고 있는 사람들 속에,
죄의식 때문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있는 억눌린 사람들 속에 건설되는 나라이어야 한다.
---- 스스로 욕심이 없는 사람이라 여겼습니다. 성경 속에서 수없이 저 대목을 지나갔을 때에도 나와는 상관이 없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세상에서 권력을 얻으려는 ‘욕심많은 자들’이나 관계가 있을 거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한때 욕심이라고 치부한 것들을 꿈꾸고 있었던 자신을 또다시 ‘인정’해야 했던 것입니다.
세 번째 시험…. 예수를 이끌고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하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사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 하였고,
또한,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였느니라.
악마의 세 번째 유혹은 또 달랐다.
예수가 모든 대답을 성경에서 끌어내고 있음을 본 악마는 자신이 먼저 성경을 인용했다.
그것은 차원 높은 유혹이었다. 성경에도 있는데, 그것이 무슨 어려운 일이냐는 것이다.
이 시험은 무엇인가.
예수가 높은 성전 꼭대기에 서서 많은 군중들을 내려다보면서,
여러분, 보시오! 내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이제 증명해 보일 것입니다.
여기서 뛰어내리더라도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내 발을 붙들어 상하지 않게 하는 것으로 그 표적을 삼을 것입니다…라고 외친다 하자.
그 결과는 어찌 되겠는가.
수많은 군중들이 여기 메시아가 나타났다. 우리 모두 그를 따르자, 하며 구름같이 몰려들 것이다.
그러면 모든 일이 수월하게 풀려 나갈 것이다.
전도를 하기도 쉬우며, 복음을 전하는 데도 최선의 방법이 될 것이다.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큰 조직을 만들고, 그 위력을 힘입어 한꺼번에 수만 명에게 전도를 하고, 매스컴을 동원하고.
수단과 방법만 좋으면 남들이 몇 해에 걸쳐 할 일을 하루 이틀 동안에 해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생각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 자신들도 그런 방법과 수단을 찾고 있다.
기독교가 계속 노력해 온 길이 여기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예수에게 있어 그 문제는 더욱 절박했다.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예수가 인류를 대상으로 하늘나라를 건설하는데,
다른 것은 모르더라도 어떤 수단과 방법쯤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지혜에 속하는 것이니, 하나님도 묵인하거나 용납해주지 않겠는가.
목적은 어차피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닌가.
권력이나 경제 같은 것은 배제하더라도 수단과 방법은 받아들이실 거라는 속삭임인 것이다.
그것에 대해 예수는 신명기의 말씀을 받아들였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세상의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는 질적으로 다르다. 두 나라를 함께 건설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하늘 나라를 건설함에 있어서 세속적인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세속적인 것과 더불어 끝나고 마는 일이다.
영원한 나라는 하나님께 속하는 것이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다.
---- 이 부분 역시 내게 회개해야 할 대목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나와 가장 관련이 없는 부분이고 시험의 내용 자체가 황당하기까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인데, 이제는 역시 나를 넘어지게 하는 시험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시점에 이르러버린 것이었습니다.
복잡한 세상입니다. 정치고, 경제고 세상살이 크고 작은 어느 분야든 얽히지 않은 것이 없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복잡한 그물망 속에서 살고 있는 것 같은 현대사회입니다. 청정한 공기만 마시고 살고 싶어도 온 도시, 온 나라를 뒤덮곤 하는 미세먼지, 대기 오염물질들과 뒤섞여 함께 들여마시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그것들을 완전히 피할 방법이 없는 것처럼, 복잡한 세상은 우리를 바르고 단순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의 ‘마음가짐’인 듯합니다.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 그것을 세상 그 무엇보다도 먼저 살피고, 또 살펴야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노 철학자의 글은 내게 나의 ‘마음’이라는 것을 살피게 하는데 넘치도록 충분했습니다.
챕터1을 끝낼 무렵, 찬양 인도자들의 인도로 회중의 찬양이 시작되었습니다.
책을 덮었습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려는데, 바로 저 앞에 있는 커다란 나무 십자가를 볼 수가 없는 거였습니다. 고개를 다 들어보지도 못하고 내리고 말았습니다.
예전에 그것은 ‘나 같은 것’을 위해 죽으신, 주님의 ‘고귀한 십자가’였습니다.
인류를 위해 무력하게 고난과 고통을 당하신 ‘희생의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가 이제 ‘영광의 십자가’로 보이는 것입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의미에서의 ‘영광’이 아니라,
시험과 유혹들을 물리치신... 나로서는, 예전에는 그 어느 것 하나도 해당이 없다고 여겼던 그것들…
그러나 알고 보니, 그 어느 것 하나 넘어보겠노라 생각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시험들을, 그 유혹들을,
온전히, 완전히, 단번에 물리치신 ‘영광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감히 고개를 똑바로 들고 쳐다보기도 어려운 ‘영광’으로 빛나는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마음에 회개가 밀려와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방에서 혼자 있다가 그런 일이 일어나면 무릎 꿇고 엎드려 울면서 기도하기라도 하지, 왼쪽에는 성가대요, 앞에는 찬양팀에, 예배당의 둥그런 구조상 수많은 사람들이 왼쪽에도 오른쪽에도, 저 위층에까지 다 보이는 상황이니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시작된 마음의 찔림은 도통 가라앉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울었습니다. 울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끝없이 울었습니다.
세 가지 시험. 그것에 넘어진 사람이 비단… 그 시간 예배당에서 바보처럼 울고 있었던 나뿐일 리는 없습니다. 단지 같은 글, 같은 대목을 읽게 되어도 그것이 자신에게 해당된다고 여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진정한 회개가 일어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예배가 시작되고 찬양대가 노래를 하고 설교가 시작되었어도 눈물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노래도 설교도 귀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다른 때와는 다른 일이 예배시간에 일어났습니다.
설교후 ‘함께 기도하자’고 목사님이 말씀하자마자 기도가 시작되면서 갑자기 뒤쪽 회중들로부터 커다란 탄식소리가 몰려온 것입니다. 곧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그것들은 내 자신의 감정에 온통 몰두해있는 나를 사로잡을만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아파 죽을 지경인 것처럼 아픈 것이었고, 할 수만 있다면 이 ‘미운 나’를 두들겨패서라도 철저히 회개해서 다시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던 내 마음처럼 회개의 심령으로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물결’처럼 밀려온 그 기운을 목사님 또한, 약간 놀라셨던 것으로 보아, 그 순간 느끼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몇 초 후 더해진 말씀, 늘 그렇듯 ‘우리에게 임하실 큰 복과 은혜’를 위해 기도하자는 말씀이 덧붙여지면서 기도가 한정지어지자, 멀리서 밀려드는 쓰나미처럼 고개를 들어 와르르 일어나려던 그 물결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며 일시에 사그라들고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 바보처럼 훌쩍이며 예배를 마치면서도, 내게 마음 한 편에 이 교회 전체를 두고 어떤 ‘기대’를 하게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앞에서, 바보처럼 울었다….고 표현했는데, 그러나 바로 그 모습이, 진정으로 마음이 찔려서 바보처럼 울면서 회개할 수밖에 없는 그 마음이, 도무지 의로운 데라고는 찾을 수가 없는 우리에게서 주님께서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아닐까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날… 앞 쪽에 앉은 내 뒤로 거대한 무리로 앉아 있는 회중들… 그들 중 아주 많은 분들이 바로 그렇게, 어쩌면 그날의 나보다도 훨씬 더 철저히 통회하고 자복하며 회개하고 싶어하고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무슨 죄를 지었기에 그토록 회개하고 싶어한 것일까….
본인들의 개인적인 문제만으로 그렇게 심하게 가슴 아픈 통회를 하려들었던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교회 전체… 더하여 자신들의 사랑하는 목자를 위해…. 그 분이 넘어지신 시험들에 대해 바로 자신이 저지른 일처럼, 아니 그것보다 더한 마음으로 함께 가슴 아픈 통회의 짐을 나누고 싶어하는 간절함이 그들 속에 있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그들은….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부분들은, 연세대 철학과 명예교수이신 김형석교수님의 책
[예수, 성경 행간에 숨어있던 그를 만나다](도서출판 이와우) 중,
챕터1 ‘영원한 것을 향한 새로운 출발’에 나오는 것임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