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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바위 산


BY 플러스 2016-03-01

  2016 2 28

 

눈이 많이 내렸습니다. 어느 해 못지않은 추위 속에서 보낸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삼월을 코 앞에 두었다는 생각에서인지 또는 오랜만에 보는 풍성한 크기의 눈발 때문인지, 거리의 좁은 간판 아래에 서서 바라보는 눈은 포근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네모나고 회색투성이의 특색 없는 일상의 거리도 하나만으로도 오래 감상할 수 있는 풍경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날이었습니다.

 

눈을 맞으며 집을 향해 걷기 시작하자, 문득 어제 올라갔던 산 위의 풍경이 떠올랐습니다. 조선 시대, 매를 날려 사냥을 했다는 바위가 있어 응봉이라 불리었다는 산은 이백 미터 조금 넘는 낮은 높이에도 불구하고 능선을 따라 걷는 코스가 꽤 길고 풍성했습니다. ‘야생 멧돼지가 출몰할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현수막을 몇 개 지나 북한산 방향 쪽으로 난 초록숲길을 걸으며 느꼈던 상쾌한 기분, 나무들 너머로 점점 다가오던 북한산 봉우리들의 수려하고 말간 바위 얼굴들. 이 내리는 눈 속에서 그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은 중턱에 있는 절의 이름을 따서 불리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안내판에 쓰여져 있던 매사냥에 얽힌 이야기, 영리해 뵈는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매의 사진- 매는 지금도 가끔씩 산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2시간여에 이르는 산책 내내 마음에 불만이 생기게 했습니다. 저 안쪽 도성, 한양의 사대문 중 하나에서 말을 타고 종자들을 거느리고 우르르 사냥을 하러 몰려 나왔을 사람들. 저 끝에서부터 타가닥타다각 말발굽 소리를 내며 산을 오르고, 정상의 어느 바위에선가 매를 날리면, 푸른 창공을 유유히 돌다가 산짐승을 향해 빠르게 활강했을 매. 그리고 다시 짐승을 향해 말을 몰았을 사람들. 그런 정경이 그려지면서, 진취적인 기상이 담긴 그림, 그런 산을 두고 연꽃과 관련된 종교적 지명을 가져다 붙이다니, 이 얼마나 어울리지도 않고 아깝기까지 한 일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런 생각은 두 시간 내내 그 산을 계속해서 매바위 산이라고 부르게 했습니다.

 

진취적인 기상. 정적이기 보다는 동적인 그림들. 발전적이고 적극적인 행동들. 그런 태도. 그런 것을 나는 언제나 좋아하기만 하는 것인가 하면, 꼭 그렇지는 않은 듯싶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여러 상황적인 것들 때문에 힘을 얻고 싶어서 갔던 A교회. 몇 년 만에 교회다운 교회에서 예배다운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감격도 잠시, 전진! 전진! 만을 외치며 어떤 성벽이라도 넘어 행군할 것 같은 진취적인 기상과 열심으로 숨 돌릴 틈도 없는 팽팽한 분위기에 서서히 질려갔던 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지난 주일에는 두 달 이상 다니던 A교회가 아닌 다른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었습니다. 정갈하고 적당한 규모의 예배당, 점잖고 지적인 교인들, 조용한 예배. 고음으로 큰소리로 뻗어나가는 합창보다 때로는 피아니시모로 여리기 울리는 목소리가 더욱 강력하게 사람의 마음 속으로 파고들 수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찬양대….. 편안한 마음이 드는 예배였습니다.

 

그러나 주일인 오늘, 별 갈등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그 교회대신 A교회로 향했습니다. 전날, 꿈에서 A교회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교회의 주위에 맑은 강물이 둘러싸듯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참된 크리스찬은 하나님중심의 삶을 산다고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뜻에 두고 살았던 적도, 그렇게 노력한 적도 있긴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삶을 놓고 볼 때, 또는 가까운 과거의 시간들을 두고 볼 때에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내 몸이 먼저였고, 내 뜻이 먼저였으며, 내 가족이 먼저였고…. 치워도 끝이 없는 눈덩이들처럼 쌓여 있는, 또는 도저히 해결할 방법이 없어 보이는 눈 앞의 상황들이 먼저였습니다. 그것들은 나로 하여금 숨을 쉴 수 없도록 몰아갔고, 어느새 하나님 중심이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도록 감각과 판단기준, 생각마저 모두 잠식해 들어갔으며,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포기하듯 익숙해졌습니다. 잠시 깨달음이 있다 해도 그것은 표면에 그칠 뿐 나를 변화시키지 못했고 그것마저 곧 잊고 말았습니다.

 

그런 에게서 돌이킨 것이 며칠 전이었습니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급류에 떠내려가듯 매 순간을 지냈던 것에서 어느 순간 마음먹고멈추었고 하나님만 바라보았으며 그 상태로 조금 오래 기도했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이제 영 멎지 않을 것 같던 그 급류가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결심했던 대로 이제 다시 그 분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을 시작하는 것이 나의 도리이자 행할 바였습니다. 잊었던 걸음마를 다시 내딛는 것처럼 그렇게 교회로 향했습니다.

 

예배 전 잔잔한 찬양이 시작되는가 했더니 역시 떠들썩하게 박수를 치며 힘찬 찬송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잔잔한 찬양 속에서 경건해지던 마음이 화들짝 놀라며 주변에 앉은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기상, 뜨거운 열심. 도무지 기질적으로 다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뜨거운 신앙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분들이십니다. 나와는 취향이 다를 뿐,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분들이든 같이 열심히 박수 치며 찬양하는 분들이든 믿음의 용사들인 것입니다. 한동안 계속되는 찬양의 시간 동안 나는 박수를 치지도 찬양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고 잔잔한 찬양을 따라 부른 것도 아닙니다. 그저 취향이 달라서 선뜻 같이하지 못하는 것인가하면,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무거워지는 마음. 그리고 그 무거운 마음으로 그분들의 열심을 오히려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 무거운 마음은 잠시 타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다녀오고 난 후 돌아와서 그런지 오늘따라 더욱 심하기만 합니다. 예배시간이면 자주 거대한 바위덩이처럼 마음을 짓누르는 것. 도무지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그것.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는 그것을 피해 갈 만한 다른 곳이 없다는 것. 마음을 다스리고 잠잠히 있다가도 찬양 중 하나님의 크고 광대하심, 의로우심 등을 노래하는 부분이 나오면 내 마음은 어김없이 날카롭고 강한 무엇으로 찌르는 듯하여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미간이 일그러지며 하고 길게 숨을 내쉽니다.

 

오늘은 외국에서 오신 목사님이 말씀을 전했으나, 예배의 말미가 되자 회중의 기도를 위해 담임목사님이 단 위에 오르십니다. 그리고 몸이 아픈 사람,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성령님의 인도로 회중들이 믿음의 응답을 받은 부분을 말씀하십니다. 말씀 도중 바로 내 앞줄 왼쪽으로 두 번째에 앉았던 할머니가 아멘하며 두 손을 번쩍 들고 일어납니다. 어딘가 나았다는 이야기가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나 봅니다.

 

눈을 아래로 내린 채로 목사님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정직하고 바른 분. 본받고 싶은 뚝심 있는 믿음. 사람을, 그리고 조국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 오래 전 이 교회를 택하신 것을 보여주셨을 때에 그 때는 조금 의아스러웠으나, 예배를 통해 직접 뵙게 되면서 하나님의 판단에는, 그 분의 선택에는 틀림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렇듯 바르고 단단하신 분이 맨 앞에 서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염려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주 화가 나기도 합니다. 많은 일, 큰 일을 이루며 살아왔다고 해서 그 일을 이루며 지나온 세월 동안 자신들로 인하여 넘어진 사람들이 있는데, 그저 하나님 앞에 회개했다는 것으로 또는 보여주는 쇼 같은 회개로 넘어가고 말 일인가, 하는 생각이 끓어오르기 때문입니다. 회중의 뜨거운 열심이우리끼리 탱크처럼 뭉쳐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으로 한다.... 정도에 그칠까 염려스러운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조국의 사람들을 사랑한다면, 전진만을 외치며 나아갈 것이 아니라 멈추어서…. 설사 그것이 오래 걸리는 일일지라도 멈추어서 나로 인해 넘어진 사람들을 손잡아 일으키고 보듬어야 하는 것이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된 도리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철저히…. 그들이 만족할 때까지라도.

 

오늘은…. 연로하신 원로목사님이 스크린이 여러 번 나왔으므로, 내 마음과 시선은 참담함으로 스크린 속의 그분을 향하곤 했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사소한 것 하나 조차 쉬운 일이 없는 듯합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것을 절실히 느끼게 됩니다.


 때론 생각해봅니다. 성경 속 이야기는 너무나 단순해 보인다. 부패와 타락으로 인해 진노를 면할 길 없다고 선포된 니느웨성 사람들의 이야기조차도 일순간에 회개하고 극적으로 그것에서 벗어나지 않던가….. 그 시대는 단순한 시대이고 사람들 또한 단순한 사람들이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죄의 상들도 왜 이리 복잡하게 얽혀있고 그것으로부터 돌이키는 것도 그리고 사회에 일파만파로 번진 부패와 타락을 수습하는 일도 왜 이렇게 어렵기만 한 것인지,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또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어렵기만 한 것입니다. 부패의 수면 위로 드러난 사람들은 물론이요 직간접적으로 이해관계에 얽혀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입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다 보니 복잡한 사회의 그물망은 더욱 복잡하게 뒤엉켜 손을 쓸 수가 없어 보일 정도가 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줄 압니다.…. 먼저 희생할 사람들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가장 높은 곳, 오늘날 한국교회를 이룬 분이자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분부터 시작되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내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그 교회에 앉아 있습니다. 그 은혜가 참되고 든든한 반석 위에, 가능하다면 모든 오점이 다 씻겨나간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앉아 있습니다. 나 역시 곧, 이제껏 다물고 있던 입을 열어 회중들과 똑같이 찬송하고 마음을 합하여 함께 열심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