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독일에서 나 보다 세 살 많은 한 여인이, 어느 날 집 앞까지 자신을 따라 온 독일 청년에게 그녀가 나이 사십이 넘은 유부녀임을 믿게 하느라 애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서양인들은 대체로 동양인, 특히 동양 여자의 나이를 쉽게 가늠하기가 어려운가 봅니다.
나 자신도 나이와 관련해서 간혹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가 있곤 했습니다.
역시 독일에서, 쇼핑몰이 모여 있는 거리의 커다란 약국에 영양크림을 하나 사러 들어갔을 때였습니다.
선반 위의 화장품을 보고 있는데 한 아가씨가 다가왔습니다. 친밀감이라도 느낀 것인지 거의 얼굴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다가온 그녀가 묻는 말에 영양크림을 하나 찾는다고 했더니, 십 대 후반이나 이십 대 초반의 아가씨가 쓸 만한 것을 골라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나이에 맞는 것으로 찾아달라며 나이를 말해주었습니다. 2, 3초 쯤 가만히 있던 아가씨에게서 '헉' 하는 소리가 나더니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것이었습니다. 한 발자국, 그리고 또 반 발자국..
물러선 거리를 조금도 좁히지 않은 채로 나름대로 판매원으로서의 최소한의 의무를 해 보려는 것 같긴 했지만, 하얗게 질린 얼굴로 쳐다보는 그녀를 보며 나 자신도 놀란 것을 물론이고 무언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 미안함에 사로잡히기까지 했던 것이었습니다.
아가씨인 그녀가 느끼기에 그 숫자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이라는 것인지, 또는 그녀가 생각한 나이와 전혀 맞아 보이지 않는 '나'라는 사람이 무섭거나 징그럽기라도 한 것이라는 건지. 약국을 나와서도 찜찜함은 한동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지금 이 곳 비엔나에서도 나이와 관련해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콘서바토리의 나이 많은 한 여선생님의 경우에도 나를 얼마 전까지 '멭헨(소녀)'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그 앞에 '음악적으로 매우 뛰어난' 이라는 수식어를 넣어서 그렇게 말하는 것인데, 옆에 스물 한 살짜리 한국 아가씨가 있는데 그 학생에게도 쓰지 않는 단어를 내가 듣고 보니 너무 당황한 나머지 처음에 정정을 못했더니, 일 주일에 한 번 만날 때마다 그 호칭을 듣게 되곤 했습니다.
어느 날 마음 먹고 선생님 이야기를 끊은 채 나이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 분이 'Du bist Baby' 라며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몇 주에 걸쳐 확인을 시켜주고 나서야 이제는 '융에 프라우(젊은 부인)'으로 바꿔 부르시긴 하지만, 아쉽게도 이전의 '이뻐함' 수준의 친밀함은 회복하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습니다. ^^;;
파릇한 남녀 학생들과 섞여 음악이론 수업을 듣는 때에도, 그 학생들과 똑같이 그래서 때로는 좀 심하다 싶게 대하던 선생님도 계시고, 또 자신들 정도의 나이로 여기고 너무 쉽게 대하려는 학생들도 있어, 나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어린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을 때도 가끔은 있습니다.
그러나 또 그 반대로 어린 학생들과 비슷한 연령대로 보아주길 바라게 되는 때도 있습니다. 무슨 연유로 인한 것이든 호감을 가지게 되는 남성인 선생님인 경우에.. 나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바로 그런 선생님 앞에서 내 나이가 훤히 알려지게 되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것도 나 자신의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모습을 우르르 보여 주고 난 뒤에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이론과목들 중에서도 어렵고 깊이 있는 강의로 유명할 뿐 아니라, 시험이 어렵고 점수도 박해서 패스하지 못해 여러 번 재시험을 보는 학생들이 많기로 잘 알려진 S 선생님 과목의 시험이 있던 날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독일어를 잘못 알아들어 첫 시험 시간에 시험을 치르지 못하게 된 내 실수를 두고, 상황을 빨리 파악하지 못한 채로 선생님께 따지고, 어떤 상황인 지 알게 된 후에도 창피한 마음에 자존심을 곤두세운 채로 내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다시 그 상황에 대해서 선생님을 향해 따져 묻는 어이없는 행태를 벌인 것이었습니다. 그 당당하기가 어이없을 정도였던 것이었지요..
굳이 변명하자면, 열 페이지 넘게 요약하여 통째로 외워 머리 속에 아슬아슬하게 입력해 놓은 독일어 문장들이 그 날 시험을 보지 못하게 되면 다 날아가 버릴까 두려웠고, 그 날따라 이상하게도 시험 바로 전에 두어 가지 일을 겪으면서 신경이 많이 예민해져 있었다고 말할 수는 있겠습니다.
평소 S선생님의 인품답게 다른 선생님들 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침착함으로 다 응대해주시긴 했지만, 그로부터 한 시간 후 치를 수 있게 된 두 번 째 시험 시간에 강의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선생님이 약간 겁을 먹은 채로 나를 의식하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타입의 시험지가 섞이지 않도록 한 사람씩 시험지를 건네 줄 때에도, 책상 위의 필통과 가방도 다 내려 놓으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내 어깨를 뒤에서 슬쩍 찌를 때에도, 학생들이 시험을 잘 보고 있는 지 돌아다니며 점검하느라 모든 학생들의 시험지를 살펴보고 한 두 마디씩 격려 내지 조언을 해 줄 때에도 나를 향해 올 때면 선생님의 겁먹은 떨림이 불안함으로 커지는 불규칙한 호흡소리로, 마른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로, 또 목소리의 떨림으로 느껴지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밖에서 기다리는 한 시간 동안 반성할 시간은 충분했던 지라, 처음에 시험지를 받을 때 최대한 착한 목소리로 '당케'라고 말했음에도 그 겁먹은 떨림은 줄어들었을 뿐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던 모양이었습니다.
어느 덧 악곡 분석쪽 시험지는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채로 한 시간이 지나가 버리고, 선생님의 요구에 따라 시험지와 학생증을 들고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S 선생님이 내 앞에 선 몇 명의 학생들의 얼굴과 사진을 대조하고 돌려주고 하는 동안에도 줄에 서 있는 나를 내내 의식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잠시 후, 하나 건너 앞에 서 있던 예쁘장한 서양 여학생이 시험지를 내고 돌아 나오면서 아까 강의실 밖에서는 멀쩡하더니 갑자기 일없이 나를 향해 살짝 눈을 흘기고는 지나갔습니다. 이 아이도 나를 제 또래로 아는가 보았습니다.
내 차례가 되어 내민 학생증을 받아든 S선생님이 학생증을 대충 살펴보고는 내게 돌려주지 않은 채 다시 사진이 있는 첫 면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는 시간이 아주 많은 사람처럼 천천히 들여다 보기 시작했습니다. 두 시간 전에 보았던 여자, 그리고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여자와도 좀 다른 더 성숙해 보이는 온화한 얼굴을 한 채 조용히 웃고 있는 여자가 거기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가 언젠가 본 적이 있는 것과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여자일 것이었습니다.
사진과 본인을 대조하는 절차는 잊으신 듯, 천천히 오랫동안 사진을 들여다 보는 S선생님의 얼굴에 따뜻함이 조용히 물감처럼 번져갔습니다.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천천히 옆 면을 펼쳤습니다. 거기에는 등록을 확인하는 도장이 찍혀 있을 것이었습니다. 도장 두개 찍힌 것이 전부인 것인데도 천천히 멈춰 있는 것을 보니, 아마 학생증을 빨리 돌려주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모양이었습니다.
다시 마지막 뒷면을 천천히 펼쳤습니다. 거기에는 콘서바토리에 처음 등록한 날짜와 그리고 생년월일이 있을 것이었습니다. 생년월일?
선생님 바로 앞에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서 있던 나는 갑자기 가슴이 무언가로 '팍'하고 찔리는 것만 같았습니다. 조용하고 온화한 지적인 학자타입의 신사인 S선생님 앞에서, 아주 가끔 희귀하게(?) 발생하는 팔팔한 성미의 단면을 보여줌으로써 이미 이미지를 다 망친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전에 마음 착한 이 선생님으로 하여금 급격하게 호감을 가지게 한 우연한 마주침의 인연이 있었던 것인데, 이제는 바닥에서 더 바닥으로 내려갈 일만 남았다고 여겼습니다.
뻔히 보고도 마음 속으로 바란 것과는 달리, 역시 그 숫자들을 보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조용히 들여다 보고 있던 것도 잠시, S선생님의 온화하게 풀려 있던 눈 주위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상태로 몇 초간 정지.. 아마 숫자의 의미를 다시 파악하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이제는 거의 벌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오랜 시간 만에 처음으로 선생님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습니다. 숨을 죽인 채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천만뜻밖에도 부정적인 반응이 아니었습니다.
천천히 온화하게 내 얼굴 전체를 그리고 사진 속에서 미소짓고 있는 입술과는 달리 긴장으로 꼭 다물고 있는 입술을 스쳐간 눈이 내 눈에 고정되었습니다. 따뜻한 미소가 가득 담긴 눈이었습니다.
일 초, 이 초... 십 초... 아무 말도 없이 따뜻하게 웃고 있는 눈으로 내 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동그랗게 뜬 눈으로 마주 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속으로는 많이 놀라고 있었습니다.
이 분의 눈에는 내가 예상한 충격도, 나에 대한 실망이나 비난 또는 경멸 같은 것도 전혀 없었습니다. 따뜻함 뿐 아니라, 알 수 없게도... 어떤 안도감이 깃든 기쁨이 가득 담겨 있던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학생증을 받아들자 나 자신의 실수로 인한 겸연쩍음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내 속마음을 숨기기라도 하듯 휭하니 돌아서서 나오긴 했지만, S선생님의 '착한 성품'을 우연하게 들여다 보게 되었던 어느 날 느꼈던 기쁨과 닮은 기쁨이, 그리고 나 자신 나도 모르게 내 나이를 두고 타인의 반응에 불안감을 가지곤 했던 것을 이제는 어딘가 멀리 던져 버린 것 같은 홀가분함이, 그리고 잔잔하고 평온한 행복이 나를 감싸던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