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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BY 플러스 2009-11-18

 

이 아침 연 인터넷 뉴스 창에 ‘재혼 남편의 선처를 구한 엄마의 모진 선택’이라는 제목이 눈에 뜨였습니다. 

 

한 여자가 자신의 10살 된 딸 아이에게 몹쓸 죄를 지은,  딸에게는 계부인 남편의 처벌을 원해 4년의 형을 받게 되었지만, 막상 두 아이와 이제 새로 태어난 남편의 딸아이까지 키우려고 보니 기초생활비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 갓난아이가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서까지 고민하게 되었고 끝내는 남편의 선처를 재판부에 호소하게 된 모양이었습니다.

 

어린 자녀들의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어미로서의 각박하고 힘들 삶에 대해 동정하는 마음과 아픈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한 사람의 여자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어린 여자 아이의 상처입은 삶에 대해서는 그저 아픔이라고 말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으로 착잡해져 왔습니다.

 

그 어머니는 딸이 상처를 자신 보다 쉽게 이겨냈을 뿐 아니라 자신을 위로하기까지 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어려움과 고통이 먼저 다가 올 어린 아이의 착함을 '성숙한 극복과 치유'로 판단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오해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재판부에서는 그 탄원을 두고 심사숙고를 한 모양이었고 법적으로 해 줄 수 있는 만큼의 감량을 해 준 모양이었습니다.

 

 기사의 아래에는 많은 댓글이 달려 있었습니다. 

 

사회적인 복지 정책에 대한 문제, 여성부의 업무에 대한 비판 내지 조언의 글 등 사회 기본 시스템의 개선에 관한 문제제기의 글들로부터 이 사회의 도덕적인 해이를 한탄하는 글들, 또 그러한 처지의 엄마에 대한 깊은 동정과 함께 우선적으로 고려했어야 할 현실적인 방책에 관한 조언들도 많이 보였지만, 가장 많은 것은 어린 여자아이가 겪은 상처와 앞으로의 삶에 대한 우려와 분노가 모진 선택을 한 어머니에게로 분출되는 글들이었습니다.

 

견디기 힘들 상처를 겪은 가족들의 어려움이 무엇보다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지만안타깝게도 현실적으로... 한 가정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적으로 확대시켜 함께 생각해 보고 풀어가야 할  문제이기도 함을 보여주는 글들이기도 했습니다.

 

한 편 댓글을 읽어내려가면서, 이제 우리는 전 시대의 가난을 벗어난 시대 속에 살고 있음에도, 여전히 정신적으로는 그 극빈함에 주저 앉은 채,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자기합리화나 동정심을 유발하는 정서가 우선인 채로, ‘바름의 판단을 유보하거나 뒷순위로 제쳐두는 경우도 꽤 많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때로 그런 점은 기사 속의 생활고수준과는 다른, 사회 곳곳에서 약간의 경제적인 이익을 두고 벌어지는 크고 작은 부정이나 거짓, 부패나 타락에 대해서도 옳지 않은 일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과 연관되는 정서가 아닌가 싶기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엄마 생활고 운운하는 사람들에게라는 제목으로 달린 댓글 하나는, 나라에서 지원되는 보육료 등을 통해 아이들을 위탁하고 아르바이트를 통해 어렵지만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는 여자들도 자신을 포함하여 꽤 많음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렵지만 자존감을 가지고 아이엄마가 살아주기를, 또 현실적으로 방법이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기사 속의 아이엄마는 단지 생활고로 인하여서만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사람이지만, 그녀는 남편인 그를 의지하고 사랑하며 행복을 누리고 살고 싶은 것일 지도 모릅니다. 

 

  이미 이루어진 그녀의 선택이 그녀에게도, 특히 아이에게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게 하려면, 그녀로서는 앞으로의 일이 지금까지보다 더 어렵고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현명함과 지혜, 용기로 맞서고 또 극복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또 하나 내 눈길을 멎게 한 댓글이 있었습니다.  부모라고 해서 항상 정의로운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것은 아닌 것 같다는 구절이 들어 있는 글이었습니다. 

 

 부모의 말씀이면 무엇이든 옳고 그 결정이나 판단에 잘못된 것이 없는 것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던 어린 시절.  그 시절을 지나서도 일반적으로 바르게 자라온 사람이라면 보통 부모는 항상 옳고 정의로울 것이라고 기대하고 바라는 경향이 우리 안에 있는 지도 모릅니다그러나 그런 순진한 바람과는 달리, 그 글귀처럼 내 부모라고 해서 항상 정의로운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닌 것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을 맞아야 하는 것이 또 우리들이기도 하구요.

 

실상 객관적으로도 정의롭지 못할 때가 있을 뿐 아니라, 부모 자신의 목숨 보다도 더 사랑한다고 말하곤 하는 자녀를 위해 내리는 결정에도 ‘진정한 사랑’은 부재되어 있을 때가 있음을 알게 될 때도 있다는 것. 사실상  '우리'라는 인간은 부족하고 오류투성이일 뿐 아니라 이기적인 동기와 자신의 얄팍한 자존심을 자식에 대한 사랑보다도 더 위에 놓고 판단할 때 조차 있는 어리석은 인간에 불과함을 오히려 우리 자신이 부모가 되고 나서야 더욱 잘 깨닫게 되는 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자식인 우리는 부모에 대하여 ‘환상’을 품고 있는 어린아이일 뿐임을… 얼굴없는 누군가가 쓴 그 구절을 통해 들여다 보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들어 ‘부모의 사랑’으로 비유할 때가 있습니다.  자식은 배반할지언정 자신은 결코 자식을 배반하지 않으며, 실제로 위급한 상황에서는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는 자기 희생적이고 고결한 그.. '사랑'을 우리는 듣고 또 보며 살아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비춰내시는 사랑은, 목숨을 내어놓을 만큼 사랑하지만 이기적이고 부족하고.. 그 판단 마저도 확고하게 의지할 만하지 못한 존재일 뿐인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만큼의 사랑이 아니라, 그 분 자신만큼 정의롭고 그 분 자신만큼 큰 사랑인 것을 믿습니다.  아무 근심 없이 온전히 의지하고 모든 것을, 또한 영원히 맡기고 신뢰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형제이신 한 목자에게 하신 일을 두고, 목자를 향해 이루신 놀라운 변화를 이제 보게 하셨음에도, 나 자신 또한 ‘nothing’일 뿐임을 depressed된 두려움 속에서 느끼며, 마치 해를 입을까 두려워하듯 주님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고자 해 왔던 마음을 회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