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낮의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던 고대 근동의 마을, 뿌연 흙먼지가 부유하는 건조한 대기 속을 휘적거리며 한 여인이 우물가에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한 채 살고 싶은, 떳떳하지 못한 과거가 많은 그녀에게도 육신의 갈증을 풀어 줄 '물'은 꼭 필요했던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없었어야 할 그 날 그 시각, 우물가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녀 뿐 아니라 그녀가 살고 있는 마을의 다른 사람들을 낮게 여기며 상종하지 않을 부류인 '유대인'이 분명한 남자였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가 말을 걸었습니다. '물을 좀 달라’고.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들 중의 하나로 생각되는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마음을 내민 주님께로 이어지는 여인의 질문과 답을 통한 길지 않은 대화 속에서, 여인은 육신의 갈증을 해갈할 '물' 뿐 아니라 그녀의 존재 근원적인 갈증을 해갈할 '살아있는 물'을 주실 주님에로 점점 눈 떠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는 그 아름다운 만남의 이야기를 두고 펼쳐지는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귀한 시간 내내 마음 한 쪽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던 것은, 설교 말씀이 시작되기 전에 들려 온 한 소식으로 인해서였습니다. 교회의 이쪽 캠퍼스의 담당목사님이 갑작스럽게 사임하게 되셨다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추측해 보건대, 결코 본인의 의사일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교회의 홈페이지에는 지난 몇 년간 섬겨오신 목사님이 갑자기 사임하게 됨에 대한 섭섭함과 슬픔, 분노의 감정을 표현한 댓글들이 보였습니다만, 어쩌면 가장 마음 아파야 할 사람 중의 하나는 나 자신일 수도 있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마음 속에 회오리처럼 밀려들던 감정은, 예배 중 주체할 수 없게 될 만큼 커져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감정이 차단되며 주님이 내게 하셨던 말씀이 차분히 떠올랐습니다.
재작년 겨울, 주일 예배에 몇 주째 참석하지 못하고 있는 목자를 두고 염려의 마음이 계속 들던 날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순간, '내가 그를 다른 곳으로 옮길 지라도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는 주님의 질책이 서린 듯한 말씀을 듣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아프시다기에 건강을 염려한 것인데, 전혀 엉뚱한 말씀을 하신 것을 두고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지 잘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에서 한 제자에게 '너는 나를 따르라'는 말씀을 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과도 비슷하니, 그것과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누군가에 대해 지나친 염려를 하고 있는 ‘나’에 대해 생각하고 점검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두고 나를 향해 적용하려는 의지와는 달리, 지나 온 시간 동안 예배 중 가끔씩 회의를 많이 느끼게 될 때면 그 말씀이 자꾸만 떠올라 염려스럽고, 때로는 화도 났습니다.
커다란 어른이 자신이 극복해야 할 장애물을 두고 넘지 않으려고, 또는 아예 없는 것처럼 여긴 채 스스로 행복해 하고만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보는 목자는, 성공와 부흥이 검증된 것처럼 보이는 시스템과 나름대로는 새로웠을 방법론 적인 것에 안주해서는 안 될, 큰 가능성을 가진 분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외국의 성공한 모델을 도입하여 적용하며 만족하고 자부심을 가지는 정도가 아닌, 진실로 우리 정서에 알맞을 뿐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순결하고 아름다운 예배를 창조해 나갈 저력을 가진 분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큰 목사님의 예고를 들으면서 한 편으로는, 처음에는 그렇지 못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근간에 이르러서는 조금씩 변화되어가심을 보여주셨었는데, 왜 계속 그런 완만한 길로 가게 하지 않으시고 급작스러운 방법으로 인도하시는 것인가 하는 반동의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 편, 그 겨울 하신 말씀은 그 말뜻 그대로이기도 했음을 아픔 가운데에서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겨울 내게 들려왔던 주님의 말씀을 두고, 그 시간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 자신 또한, 주님이 내일이라도 '오라' 부르시면 그것에 순종해야 할 존재일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또는 오늘이라 하지 못하고 내일이라고 함은, 아마 아직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어서이겠지요.
약한 나를 두고 내게도 어쩌면 호된 명을 내리실 수 있는 주님이시라도, 복음성가의 한 구절처럼 '광야에 길을 만드시고 날 인도하시고 사막에 강을 만드시길' 원하는 것처럼, 다시 돌이키실 요량이 아니시라면 목자께도 주님이 앞서 행하시며 새 길을 만드시고, 새로운 강을 만드시며 새 일을 행하시길, 그리하여 더 깊고 큰 바다에 새롭고 아름다운 배를 띄우게 하시길 기원합니다.
오랜 '갇힘'에서 벗어나 마음의 눈을 뜨고 ‘구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 본 여인은, 자욱한 먼지를 뚫고 마을로 달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피하기만 했던 마을 사람들을 향해 자신이 만난 주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보러 나와 마을에 유하기를 청한 마을 사람들이, 그 분의 말씀을 듣고 고백한 것이 여기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을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이신 줄 앎이라.'
늘 부족하고 후회가 많은 이 사람의 글들을 읽게 되는 분들 중 많은 분들 또한, 여기 저기 좌충우돌 실수투성이의 부끄러운 글을 통한 '들음'을 지나, 친히 그 분을 만나고 그 분을 통해 직접 듣고 보게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