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개월 전, 근처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교회셔틀버스가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집을 향해 걷다가 아무래도 택시를 타야 할 것 같아 택시를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예배를 끝내고 돌아가려는 사람들과 다음 예배를 위해 어딘가에 주차를 하려는 사람들로 좁은 도로는 거의 주차장을 방불케하고 있었습니다. 마을버스도 택시도 타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복잡한 도로를 조금 벗어나니 맞은 편 직각으로 뚫린 도로쪽에서 좌회전하여 들어오는 택시가 하나 눈에 띄었습니다.
적어도 오십 대 중반은 넘어선 것으로 보이는 운전기사 아저씨는 우리 부부가 택시의 뒷자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말을 던져왔습니다.
"여기 교회는 사람이 많은가 보죠?"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말투같지는 않았으므로, 주변에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자동차들로 막힌 번잡한 도로의 그림을 머릿속에서 떨쳐내지 못한 채, 나는 그저 '그런가요?'하고 대답했습니다.
"많죠. 여기 주변에 큰 교회가 몇 개나 있잖아요. 저기 **교회하고, 저기 **교회하고.. 부근에 큰 교회 중에서 제일 사람이 많이 몰리는 거 같아요. 저기 **교회가 0만이라던가? 근데 거기보다도 많아요. 훨씬 많아요."
아저씨의 말에 그저 '네'하고 대답하는 내게 아저씨는 계속 말을 이었습니다.
"여기 교회 목사가 카리스마가 있나 보죠?"
아저씨는 대답을 기다렸지만, 나로서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저 두어 번 정도 예배에 참석했던 것이 전부였던 때이고, 무엇보다도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세상적인 '카리스마'와는 연관지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태였으므로 아저씨가 던진 말을 두고야 예배시간에 본 목자의 힘찬 모습을 떠올려 보게 되던 것이었습니다.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나를 우리를 향해, 아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아저씨는 다시 말을 툭 던졌습니다.
"이 교회도 옮겨야 해."
이제껏 약간의 물음조의 말들과는 달리 강한 어투로 던지는 말에 내가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옮겨야 해요?"
"그럼, 옮겨야죠. 이래서야 되겠어요?"
아직 택시는 복잡한 거리에서 앞으로 잘 빠져나가지 못하는 상황 속에 있었습니다.
몇 식구 모여사는 집도 한 번 이사하려면 여간 힘이 드는 것이 아닌데, 몇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이는 예배터를 어디로 쉽게 옮길 수가 있다는 것인지, 아저씨에게 오히려 농담처럼 되물어 보기로 했습니다.
"어디로 옮길까요?"
아저씨는 대답할 말을 찾는 듯 하더니 다시 재빨리 답해왔습니다.
"저기 저기... 예술의 전당 뒷산에라도 옮겨야해."
그게 가능만하다면 나로서는 좋기는 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 멀지도 않을 뿐 아니라 푸르른 녹음 속에서 자연을 만끽하며 아름답고 평화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현실적으로 가능하기만 하다면 말이지요..
스스로 답해놓고도 조금은 당혹스러워진 듯한 아저씨를 향해 잠시 후에 이번엔 내가 말을 걸었습니다.
"아저씨도 혹 교인이신가요? 교회에 대해 잘 아시는 걸 보니?"
"저요? 전 아니예요. 목사들은 다 사기꾼같아서리."
자신도 자신의 말 속에 아주 위험한 단어가 들어있다는 것은 아는 모양이었습니다. 그 단어를 말할 때의 어조가 낮아지면서 미러를 통해 나와 남편의 눈치를 살피는 아저씨의 눈이 비쳤습니다.
나는 아저씨가 던진 말의 충격때문에... 아저씨는 무엇 때문인 지는 모르겠으나 잠시 무거운 침묵이 지나갔습니다.
아마, 아저씨는 자신이 던진, 그리 우호적이지 않은 말들에 대하여 변명하고 싶은 모양이었습니다. 잠시 후, 침묵을 깨고 이번에는 빠른 어조로 많은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내었습니다.
아저씨는, 크리스찬이라면서 사기꾼과 다름없는 행각을 벌이고 있다는 자신의 처남에 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재외교포로 큰 사업을 벌이고 있는 아저씨의 처남은 소위 성공한 기업인이 되었고, 오랜 세월 가족들에게 '주를 믿는 것'과 '복받은 것'에 대해 늘 자랑해 왔으나, 실제로는 차명계좌를 이용하는 등의 편법과 탈세를 일삼아 왔으며, 그 타국에서 이번에 탈세가 탄로가 나 벌금으로 징수된 금액이 얼마인지, 그러면서도 늘 고국에 돌아오면 신실하고 성공한 크리스찬 행세를 하며, 이 곳 저 곳 큰 교회에 불려 다니며 '주님이 주시는 복'에 대해 간증집회를 하러 다닌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저씨의 목소리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점점 더 화가 나는 듯 톤이 올라가곤 했습니다. 목사들은, 그런 사기꾼을 알아보는 능력도 없는 거냐고도 했습니다.
사실 아저씨는 구체적으로 징수된 벌금의 규모며, 어느 나라 교포이며, 몇 달 전에 간증했다는 교회이름이며, 또 한 달 쯤 후에 간증하러 간다는 교회의 이름이며, 그 교회의 특성이라던가 목사님의 이름 등등을 다 이야기했으므로, 서울이든 인근이든 수많은 교회에서 얼마나 많은 간증집회가 열리는 지는 몰라도, 만일 내가 각 교회의 간증집회들에 관심이 많거나 잘 아는 사람에 속했다면, 아저씨의 처남이 누구인지 금세 알아버리게 될 수도 있을 일이었습니다.
"내가 그런 걸 다 어떻게 알겠어요. 처남이 다 얘기하니까 알지요." 라고 말한 아저씨는, 스스로 가슴에서 불이 나고 조이는 사람처럼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덧붙였습니다.
"고국에 올 때마다 예수 믿는다고, 오 년이 다 지나도록 지 부모 무덤에도 한 번 안 가본다구요."
그 말 후에 아저씨는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습니다.
인터넷에서 때로, 우리 사회에서 그 커진 세력만큼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교회에 대한 실망감, 세상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갖가지 이기적인 분쟁들, 겉보기의 세력확장 경쟁들, 부패한 모습에 심한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교회를 향해, 또 교인을 향해 따가운 시선과 분노의 목소리를 내보내고 있는 것을 꽤 많이 보게 됩니다.
아저씨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거나, 또는 그런 시각에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도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일 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 아저씨에게는 처남으로 대표되는 '한 사람의 크리스천'이 보여준 위선적인 모습에서 기인한 배반감, 분노인 것을 알게 된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보면, 자신의 가족사라는, 자신의 얼굴에 스스로 구정물을 끼얹는 것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그런 이야기를 생판 남인 사람들에게 그런 방식으로 털어버린 것은, 그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 분노감이 그만큼 커서라던가, 또는 신중하지 못한 사람이어서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저씨는 본질적으로는, 바로잡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더 큰 가족인, 대한민국 사람들인 우리들속에서, 또는 크리스찬들이라는 당신들속에서, 자신의 피붙이같기도 한 '그'를 '함께' 바로 잡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릴없이 허공을 향해 던지는 말처럼 무심한 타인을 향해 던져지는 것이 될지라도 말이지요.
몇 주 전, 한 열흘 간에 걸쳐 에세이방에서 서로가 서로를 가슴 아프게 하는 글들이 주거니 받거니 올라왔던 듯 합니다.
다른 일로 마음이 바빴던 기간이었던 지라, 그간 있었던 일을 잘 파악할 수는 없는 한계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아컴을 오랫동안 지켜온 분들이 떠나게까지 되었던 일일 뿐 아니라, 스스로 크리스찬이라고 말하는 사람인 나의 입장에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어 잠시 자판을 계속 두드리게 됩니다.
이 보다 완벽할 수는 없다는 말이 어울려 보일 만큼 아름답고 품위있을 뿐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세상 누구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다재다능한 끼를 펼치며 살아가는 여자 이야기.
또한 지고지순해 보이리만큼 살뜰하고 낭만적인 사랑을 그녀에게 쏟아 부어주는 사회적으로도 출중한 능력을 지닌 남편.
그러나 그 안에는 사랑하는 아이들을 잃었던 슬픔이 있고, 그것으로 인해 남편마저 잊고 싶어한 아픔이 있었으며,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잘 모시려는 착하고 고운 심성이 있었기에 그녀의 글들은 그녀의 기품있을 뿐 아니라 화려한 일상의 이야기들 속에 담겨, 글을 읽는 뭇여인들의 귀감이 되기도 하고, 부러움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깊은 동정을 느끼게 되곤 했던가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 에세이방의 그녀들은 그 스스로를 공주라 이름지었던 그녀를 사랑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가 허구에 불과한 거짓말이었다고 몇 사람이 짚어내기 시작하면서 아마... 서로를 향해 가슴을 파고드는 비수처럼, 글들이 조금씩 날을 세워갔던 것도 같습니다.
나 또한 그녀의 글을 예전에 몇 번 읽어본 기억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에는 이런 완벽한... 낭만적일 뿐 아니라, 한결같이 오매불망 아내를 아끼며 절절한 가슴으로 기다려주는 남편도 있구나..하는 놀람으로, 그리고는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는, 무언가 앞 뒤가 잘 맞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생각이 들면서, 혹 이 분은 사실이라기 보다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글로 썼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그 후에는 글을 잘 읽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그렇게 지나친 나와는 달리, 감성이 풍부할 뿐 아니라 인생에서 겪은 많은 굴곡으로 연민과 긍휼, 그리고 사람을 껴안고 싶어하는 마음이 많아진 많은 여인들은, 글들, 어구 하나 하나를 모두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서로 댓글 등을 통해 애정의 마음을 쌓아가고 있었다고 생각했고, 그런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이 조작된 허구일 수도 있다는 사실 앞에 농락당한 듯한 배반감으로 분노하게 되었던 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많은 글들이 사라지고 없어 단어 하나하나까지 지적해 낼 수는 없지만, 어느 글에선가 한 분이 달았던 댓글의 내용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신실한 크리스찬임을 글의 곳곳에서 드러낸 듯한 그녀는, 자신의 많은 봉사활동과 청소년 사역, 기도생활에 관한 이야기 뿐 아니라, 자신의 신앙이 돈독함을 표현한 한 구절에서, 잃은 두 아들에 대하여 그것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적어놓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 구절은 나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글을 쓰는 사람의 표현능력이라던가, 글을 쓰는 어투에 따라 따로 생각해야 할 부분이긴 하겠지만,
담담함이 좀 지나쳤던 것인지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올려 놓은 그 부분의 이야기를 두고, 한 분이 이런 내용의 댓글을 달았던 것입니다.
... 아들을 그렇게 잃은 것에도 차라리 감사한다니... 그런 무자비한 종교라면 그런 종교는 갖고 싶지도 않다...
개인적인 느낌이긴 하지만, 전혀 크리스찬같아 보이지 않은 그녀가 글의 이곳 저곳에서 마치 장식물처럼 가벼운 종교적 단어들 만으로 치장해 놓은 듯 보였던 글을 읽을 때에도, 또 진실에 관한 공방전 속에서 마음이 상한 채 오랜 세월 자신의 아픈 삶과 함께 해 온 아컴을 떠나려는 글을 읽을 때에도, 그리고 잠시 만류의 댓글을 나 자신 달 때와도 다른 종류의 염려와 아픔이, 그 짧은 구절의 댓글을 읽으며 들었습니다.
이청준의 소설 '벌레이야기'속의, 살해당한 아이 어머니가 신 앞에서 차갑게 절규하던 부분을 읽던 때 느꼈던 섬뜩함과 아픔이 떠오르며 다시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듯 하였습니다.
인터넷의 어떤 사이트들에는 소위 안티크리스찬이라는 사람들의 글들을 많이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중에는 자신들끼리 스스로 지능형 안티라 하여, 크리스찬이 아니면서 크리스찬인 듯 행세하며 안티의 역할을 하는 사람도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분들 중에는 놀랍도록 글을 잘 쓰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실상, 나는 무엇을 목적으로 하길래 그렇게 치밀하고 체계적인 전략과 전술 하에, 그런 골치아픈 일을 하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도 말이지요...
인터넷이란 사실 문지방이 없는 문턱 같아서, 어느 곳에 어느 사람이 드나들건 별 제약을 받지 않게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런 때문인지, 때로 비슷한 문체와 비슷한 어투, 또는 비슷한 수법으로 쓰여진 글들을 이곳 저곳에서 보게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런 우려가 이전에, 아컴의 좀 더 열린 공간인 토크방의 한 코너에서 든 적이 몇 번 있었다면, 이번 에세이 방에서의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도 내게 잠시 비슷한 우려가 스쳐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앞서 말한 운전기사 아저씨는 어쩌면, '목사들'이 아니라 '교인들'은 이라는 말을 그 '사기꾼같다'는 말 앞에 넣고 싶었을 지도 모릅니다. 처남으로 대표되는 크리스천들을 향해, 그 위선적인 행동 앞에 드는 분노감이라는 감정만 앞에 놓고 본다면 말이지요.
그러나 아저씨의 깊은 본심은 그 분노감의 표출이나, 어떤 류의 사람들을 그룹으로 모아 성토하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고도 앞서서 말씀드렸습니다. 어쩌면, 인터넷에는 그렇게 택시기사 아저씨같은 분노감을 겪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대변하여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들도 말이지요..
사실, 에세이방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마땅히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반응이 별로 없었다는 것에 조금 놀랐습니다.
진실이냐 허위냐를 둘러싸고 논란의 대상이 된 분의 글들을 두고, 그녀가 가졌다는 종교에 대한 회의를 드러낸 앞서의 댓글을 제외하고는 그녀 자신의 태도와 말에 대해서만 문제 삼았을 뿐, 크리스찬이라는 더 큰 대상을 향해 확대되어 가해질 수도 있을 질타는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위선적이고 편협하고 자기애에 빠져 남을 돌아볼 줄 모르는 교인인... 그녀든 누구든 교인이라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 '크리스찬됨'에 대하여 질타하는 것이 목적이라기 보다는, 그런 그녀의 드러난 ...계산된 것이든, 아니든.. 위선과 모순들 마저도 실수로 보아주고 깨닫고 돌아서길 원하는 마음에서 질책하고, 또 한 편으로는 그 질책에 대해 미안해하고, 더 나아가 껴안고 포용하려고 드는 분들을 여럿이나 그 방에서 보았던 것입니다.
한 사람의 크리스찬으로서 부끄러울 뿐 아니라, 그 포용의 마음 앞에서 나도 모르는 감사함과 또 다른 의미에서의 나 자신... 부끄러운 마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앞서의 택시에서, 내릴 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아저씨의 분노의 끝에서 잠시 기다린 나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그래도 예수님은 좋은 분이세요.."
아저씨의 목청이 소리를 지르듯 높아져서 다시 울렸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분이겠지요. 그걸 이용해 먹는 사람들이 나쁜 거죠."
어느 새 내릴 때가 다 되었습니다. 요금을 내면서 내가 다시 말했습니다.
"아저씨, 그래두... 저는 거짓말은 안 하는데요."
봄햇살같은 따뜻함이 담긴 말이어서였는지, 말없이 가만히 있는 아저씨의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 듯 해 보였습니다. 그런 아저씨를 향해 "안녕히 가세요"하고 인사하며 택시를 나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