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원로 문인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문학계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잘 알지 못하는 분이나, 책도 많이 내고 봉사활동도 많이 하셨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잘 알려진 분인 듯 했습니다.
그 분이 어느 말 끝에 자신이 예전에는 크리스찬이었음을 언급하며, 그러한 자신의 정체성이 바뀌게 된- 크리스찬인 나의 시선에서 바라보자면 정체성을 잃게 된 것으로 보이는- 계기를, 침착함이 조금 결여된 어조로 이야기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자신의 생애에서 잠시 질병으로 생과 사를 넘나들던 시기의 어느 날, 그 분은 죽음의 문턱에까지 이르게 된 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의식을 잃어가는 중 보게 된 생생한 체험처럼 여겨지는 꿈 속에서, 자신은 실제로 죽어 장사되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상황 속에서 평소에 자신이 은혜를 베풀었거나 자신의 가족을 돌보리라고 철썩같이 믿었던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혀 그러하리라고 생각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과 가족을 위해 애쓴 사람 중에는 스님이 된 지인도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때에 느낀 억울함의 감정을, 이미 십 년이 훨씬 넘게 지난 일인데도 지금도 생생하게 느끼는 듯 했습니다.
그 후, 문인은 낙원과도 같은 한 장소에 자신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곳은 아름답고 평화로워 도무지 떠나고 싶지 않을 만한 곳이었는데, 그 곳에는 동자승들이 오고 가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후 다음 날, 그는 같은 곳에 있는 꿈을 한 번 더 꾸었다고도 했습니다.
자신도 예전에는 크리스찬이었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집안 사람들을 모두 교회로 인도했으며, 그 가운데에는 성직자가 된 사람들도 서너 명이나 나왔음을 이야기하던 때의 문인의 목청에 담겨있던 거칠은 분노감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 지도, 그 자신도 꿈에서 깨어나자 마자 그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잊었다던 꿈 속에서 배반감을 느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 지도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크리스찬으로서의 삶을 내어 놓은 그 이후의 삶 속에서의 이야기들, 사회적인 봉사와 참여, 문학에의 정진과 그 성과물 등, 삶을 치열하게 또 탑을 하나하나 쌓아가듯 흔적을 남기며 마지막 남은 여생을 이뤄나가려 살아온 삶의 이야기들을, 나는 오히려 까칠한 모래를 씹듯 하는 메마름을 느끼며 듣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과 관련하여 더 깊은 이야기를 듣지는 못했지만, 그가 돌아서게 된 것이, 주님에 대한 회의이거나 어찌 보면 같은 말이지만 진리에 대한 회의와 같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며, 사람에 대한 회의 또는 실망감이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듯 하다는 것이 마음을 어둡게 합니다.
우리는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존재들로서, 진리가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를 탐구할 능력이 주어져 있음에도, 그것을 찾아가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가운데 얻게 되는 확고한 무엇에 자신의 인생을 걸기 보다는, 지성인이며 사회적인 엘리트들이라 스스로 믿는 사람들 마저도 진리 자체가 아닌 집단에 포함된 사람들을 판단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더군다나 감정적으로 마음을 다치게 되는 경우에는 어이 없을 정도로 쉽게 숙고의 과정없이 귀한 것을 내어버리고 마는 우를 범하게 될 때가 있는 듯도 합니다.
사실상, 때로 그런 함정은 내게도 찾아옵니다. 찾아왔었습니다..가 아닌, 현재형인 '찾아옵니다'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수평적인 관계를 완전히 포기하고- 마음같아서는 그러고 싶은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지만, 마치 도를 닦는 사람처럼 수직적인 관계에만 몰두할 수도 없는 것이 큰 의미에서 뿐 아니라 교회라는 ‘세상’인 것이며, 교인들의 작은 모임들인 '세상'이기도 한 것입니다.
차라리 어디든 정신적으로 평안이 느껴지는 곳이면 그저 도피해 버리고 싶은 마음, 그 평안 가운데에서 휴식을 찾고 싶은 마음이 되었던 것인지, 지난 해 여름 잠시 감정적인 파동의 마루 쯤에 들어섰던 어느 날 밤 너무나 달콤하고 편안한 꿈을 꾸게 된 적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산과 시원한 폭포가 있는 그 곳은 세상이 다 내려다 보이는 하늘 근방에라도 있는 것처럼 훤했습니다. 그 산의 꼭대기 쯤 거대한 소리를 내는 시원한 폭포와 규칙적으로 울리는 조용한 목탁 소리를 들으며 한 암자 위에 잠시 발을 내려 놓은 나는, 이제야 평안을 얻게 되었다고 기뻐하며 이 곳이 어디인지, 다시 꼭 와야겠다고 꿈 속에서 생각했던 것입니다.
별로 깨고 싶지 않은 무릉도원 같은 꿈에서 깨어난 후, 늘 예사롭지 않은 꿈을 꾸고 날 때면 분석에 들어가듯, 가만히 내가 꿈 속에서 느꼈던 감정들과 보았던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짚어가기 시작했었습니다.
'시원함', '청량함', '평화로움', '즐거움'. 그것은 분명하게 되짚어 낼 수 있는 긍정적인 느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 느껴지던 무언가 작은 이상함에로 생각이 미쳤으며, 곧 그것은 그 안에서 느낄 수 없었던 실제적인 깊이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치, 3D영화를 보듯, 또는 커다란 화면과 생생한 음향을 통해, 냉방이 잘 된 영화관에서 보는 현실보다 더 현실같이 느껴지는 스크린 속의 영상과도 닮은 데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런 영상들이 그러하듯, 잠시의 착각 가운데에서 느끼는 ‘잠깐 동안의 휴식’이며 즐거움이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잠시의 평안과 휴식마저도 반복적으로 필요할 때 언제든지 누릴 수 있다면 아무 생각없이 발을 담고 싶어지는, 갈증을 쉽게 느끼곤 하는 세상인 것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꿈에서 찾은 듯 하던 그것은, 내게 내려 놓을 수 밖에 없는 소품같은 평안이었던 것입니다.
실제의 눈으로 보는 것이든 꿈이나 환상을 통해 보는 것이든, 보이는 표면만이 전부는 아닐 텐데, 주님으로부터 돌아선 문인에게 자신의 신앙의 바탕과 내적 상태를 포함하여 다양한 각도에서 진리를 더욱 확실하게 돌아보는 것이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