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을 들어 예술의 종합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베를린에 갔을 때 가장 보고 싶었던 곳은, 건축관련 잡지에서 본 적이 있었던 파란색의 유리들로 만들어진 교회였습니다.
귀국하기 일 년 쯤에야 가 보게 된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남편을 따라 이런 저런 명소를 다니면서도, 마음 속으로 발을 동동 구르듯 기다리며 가보고 싶었던 그 곳에 도착했을 때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심하게 부서진 흉한 몰골을 그대로 드러낸 채로 대도시 가운데 서 있는 옛 건물의 잔해였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폭격으로 부서진 잔재만 남은 고딕 양식의 옛 건물은 위풍당당한 역사와 오늘날의 독일을 상징하는 수도로서의 베를린에 어울린만해 보이지 않는 폐허를 연상시켰습니다.
그 옛 교회의 처절해 보이는 외관을 못 본 척이라도 하듯, 옆 쪽으로 새로 지은 현대식 팔각형 모양의 건축물 속으로 서둘러 들어갔습니다.
천편일률적이라고 할 만한 같은 것은 아니나, 모두 파란색 계통의 조그만 네모 조각들의 유리로 사방이 둘러싸인 예배당은, 상상한 것 만큼이나 아름다웠습니다.
낮에는 안 쪽으로 파란 빛이, 밤에는 바깥에서 그 파란 빛을 볼 수 있도록 이중으로 설계되었다는 색유리들 속에 둘러싸인 채, 도시 가운데 있지 않은 평온함 속에 잠겼습니다.
마침, 이층 난간의 파이프오르간 연주석에서 한 남자가 연주를 하고 있던 터라, 환상적인 기분과 함께 평화롭게 울리는 음악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연주를 하고 있다 보면 마치 새파란 바다 속에서 연주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상상해보기도 했습니다.
자리잡고 앉은 채 좀 더 여유롭게 둘러보는 예배당은 생각보다 작았습니다. 아늑하게 느껴지리만큼..
그 곳을 나와 이번에는 무너진 구 예배당의 잔재 쪽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보았습니다.
독일의 첫 황제를 기념하여 세워졌다는 옛 교회를 다시 보니, 낡고 부서진 가운데에서도 그 위용에 찬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근대의 디자인과 건축에 많은 영향을 끼친 바우하우스를 설립했던 나라답게, 아름답고 훌륭한 현대적인 건축물을 많이 접할 수 있던 독일에서, 더군다나 큰 기대를 가지고 보고 싶었던 아름답고 특이한 현대적인 예배당 바로 옆에서, 부서진 일부만 남아 있는 19세기의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강하게 그리고 새롭게 느끼게 되던 것이 이상했습니다.
그런 묘한 느낌 가운데에서, 전쟁이 의미를 되새기려는 측면도 있었겠지만 ‘카이저 빌헬름 게디히트니스 키르헤’라는 이 건축물이 독일인들에게 가지는 의미 그리고, 그 완전히 파괴되지 않고 남은 일부나마 그대로 보존하고 싶었을 베를린 시민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며칠 전, 육 백 년의 역사를 지닌 국보1호로 지정된 문화재가 불에 탔습니다.
늘 차량으로 막히는 거리인지라 가끔 지나가는 차안에서 본 것이 전부이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큰 의미를 가지는 그 귀중한 자산이 손실을 입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주변의 도로를 재정비하여 숭례문만 덩그러니 서 있게 할 것이 아니라 잔디나 돌들을 깔아 공원화 하든지 하는 등 그 범위를 확대시켜 돋보이게 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있는 건축물 마저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그 참담함은 바라보는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하고, 또 분노하게 합니다.
그러나, 충격 가운데에서도 지나온 유구한 역사 뿐 아니라 앞으로의 역사 또한 만들어갈 주체들로서 우리는 분노보다는 어떤 방식으로 귀중한 문화재를 복원해야 할 지, 또 방치된 다른 많은 문화 유산들의 관리에 대해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며, 바라기는 현대화의 길을 걷는 가운데 서울을 비롯한 우리나라 각 도시의 마구 지어진 건축물들, 쉽게 폐기하거나 고치기 어려운 그 고형물들에 대하여도 다시 한 번 돌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경제적인 이익을 산출해 내는 데에만 급급하여 건축 철학도 예술성도 고려하지 않은 채 지어진 수많은 건물들이, 우리의 산과 강을 돋보이게 하고 어울려 아름다운 도시 정경을 만들어 내지 못한 채 얼마나 조화롭지 못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도시환경의 문제일 뿐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에게도 남을 건축물이고 그것이 모인 도시이니 더욱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잠시 전 토크방에서 인터넷의 어딘가에서 퍼온, 분노에 가득찬 글들을 몇 개 읽었습니다. 감정적으로 격하게 되면 실제적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에 초점을 두지 못하고, 관련이 있다고 여겨지는 각 곳으로 불똥이 튀듯, 사람에게로 또 다른 정책들에 대한 비난으로 또 종교에로도 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어떤 사안이든 성숙한 시민 사회답게 한 사람의 지도자에게 모든 비난을 쏟거나, 또 정책결정이 맡겨지기 보다는, 객관적인 방안에의 모색이 전문가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또 대의를 위해 옳은 것임이 확신되는 일에 대하여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차분하고 정중하게 그리고 끈기있는 목소리로 각 계층들이 참여하고 수정해가는 화합 가운데 모든 일들이 추진되고 이루어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한 편, 크고 작은 잦은 사건들을 대하면서 보게 되는 투쟁적인 태도가 사회 전반의 사람들에게 습관처럼 굳어져 오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 또 그런 태도는 과거 역사에서 돌아보게 되는 민족 전반의 피해의식으로 인함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안쓰러움이 생길 때가 많습니다.
민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우리 민족 모두의 저변에 깔린 것일 텐데, 어쩌다가 서로 정죄하려는 마음, 불신과 반목의 골이 이처럼 깊어만졌는지 하는 것도 안타깝기 그지 없는 일입니다.
상황이 어떻든, 사회 전체를 이끌어 갈 하나의 마인드, 또는 이상이 정립되어갔으면 좋겠고,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두고 지속적이고 차분한 전진이 각 계층에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사족입니다....
언젠가 한국인들의 정신세계에 대하여 연구해 놓은 것을 글로 또 화면으로도 본 적이 있습니다. 불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은 측면이 많이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의 민족적인 정신의 바탕성은 무속신앙적이며 내세적이기 보다는 현세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즉 죽음 이후에 대한 사상은, 민속적인 뿌리에서 보았을 때는 부재라는 것이지요. 혹 간혹 있는 것처럼 보일 때에 조차도 현실의 연장선에서만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고 합니다.
어느 편이 맞는 것인지, 또는 좀 더 바람직한 것인지 숙고해보기 이전에, 그처럼 현실을 중요시하는 세계관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더욱 귀히 여기고 소중히 여기며 최소한 수 십 년, 수 백 년을 내다보는 안목에서 현실의 세계를 아끼고 조화롭게 개발하여 나갈 진취적인 저력 또는 장점이 클 듯도 한데, 오히려 그 짧은 자신의 생 가운데에서 별 탈 없이, 또는 누릴 수 있는 것을 위해 분주하느라 보다 큰 안목에서 후세를 위한, 또 국토나 자연 환경 보전을 위해 자신에게 이득이 될 만한 것을 양보하거나 손해를 감수하려는 태도등이 부족하기만 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 그 현세적인 세계관이 어떤 분들이 비난하는 내세적인 세계관을 가진 종교인이라는 사람들이 가지는 무한하고 영원한 시간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기 때문은 아닌가 싶을 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