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이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흐린 하늘 아래 깊게 잠긴 숲이, 그리고 브람스가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브람스의 음악을 듣고 그리고도 아쉬워, 손이 닿지 않는 넓은 음역을 재빠른 손놀림과 페달의 도움을 받으며 그의 변주곡 몇 개를 연주해 보았습니다. 깊은 가을의 고독과도 같은 브람스의 음악세계가 주는, 깊은 심연의 숲 속에서 위안을 얻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열어젖힌 창으로 가을을 머금기 시작하는 공기가 집안 가득 오가는데, 그럼에도 이 도심 속의 가을은 못내 아쉽고 답답하기만 했습니다.
밤이 되어 나선 길, 그나마 뚫린 공간이 느껴지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서성이며, 검은 빛이 도는 파랑 같은 잉크빛 하늘과 그 하늘 위로 흘러가는 맑은 구름 떼를 보았습니다.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느낄 듯 느낄 듯 잘 느껴지지 않는 채로 아쉬움만 한 가득 느끼게 하던 계절이, 그 맑은 계절의 초입이... 지나온 시간들 속의 풍요롭고 아름답던 풍광들과 정서를 감싸왔던 순간들처럼 아름답게 그 하늘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복잡한 주변 환경 뿐 아니라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부딪혀야 하는 일상들, 이 작은 사회 속에서 며칠 간격으로 벌어지는 새로운 소동과 사건들, 바라보아야 할 믿음의 영역 마저도 혼란스러운 얼굴로 주변을 흘러가는 시간들은,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 왔던 지난 몇 년이라는 시간들은 상대적으로 자연도 사람도, 삶과 생각, 믿음의 영역까지도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단순하기만 했던 세계였던 양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이 맘때면 날마다라도 가고 싶어지던 그 숲이, 깊은 가을을 느끼게 하는 감정들을 고스란히 담은 브람스의 세계로 아무 생각 없이 잠겨 버리고 싶어지는 것은…
며칠 전에는 독일의 한국교회에서 만났던 한 자매로부터 반가운 전화를 받았습니다. 속초에서 걸려 온 그녀의 전화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서로 같은 곳에 속해 있던 것은 일 년 여, 서로 얼굴을 본 횟수로 따지자면 그리 많지도 않을 만남이었지만, 내게도 그녀에게도 독일에서 보낸 시간은 ‘그리움’이라는 단어로 떠올릴 만한 시간들이었던가 봅니다. 정이 많은 목자 안에서 만나게 된 인연이라는 점 또한 우리를 서로 좋은 감정으로 묶어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었습니다.
두어 달 전에는, 그 정이 많은 목자를 집과 멀지 않은 곳에서 뵈었었습니다.
그 무렵 어느 날 초저녁, 딸이 건네준 전화기 너머로 귀에 익은 그러나 들어 보지 못한 지 칠 개월이 넘은 목자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잠시 한국에 다니러 나오셨다는 목자와 이런 저런 안부를 주고 받는 전화는 쉽게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이야기 중, ‘바쁘시지요?’하고 묻는 나의 말에 대답으로 들려 온 목자의 말은 나를 조금 놀라게 하였습니다. ‘바쁘긴 한데… 한 번 보고 가고 싶어요’ 특유의 정이 담긴 목소리에 순진한 소년 같은 부끄러움이 담겨져 전화선을 타고 흘러왔습니다.
누군가가 상당히 폐쇄적인 작은 공간이긴 하지만 인터넷에 글을 올립니다. 때로는 자신과 관련된 글이 올라가기도 합니다. 상당히 긴장이 될 뿐 아니라, 글을 쓰는 상대방에 대하여 경계심도 생길 일입니다.
그 ‘누가’ 자신과 함께 있던 공간을 떠나갔습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벗어남’이고, 자유를 의미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점에서 피해의식을 느껴 오셨을 수도 있는 분이, 그 ‘누군가’를 보고 싶다고, 만나고 싶다고 찾으신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글을 올리고 있음을 아시면서도..
저녁약속을 잡고 이틀 후 외출준비를 위해 화장대 앞에 섰을 때, 화장하는 것을 즐겨 하는 사람이 아님에도 잠시나마 나는 왜 이 나이가 되도록 화장하는 법 하나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보게 될 목자를, 지난 몇 개 월이라는 시간 마저 되돌려 좀 더 이뻐 보이는 모습으로 만나고 싶었던 모양이었습니다.
아이들도 남편도 모두 반가운 마음으로 오랜만에 뵙는 목자와 즐거운 저녁시간을 가진 그 날, 나는 무척 행복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남편이 목자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잘 주고 받을 수 있게 된 것이 기뻤습니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기 이 주 쯤 전 예배가 끝나고 남편이 목자께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을 이야기했을 때, 남편이 목자의 눈에 어린 눈물을 보았다는 것, 그리고 지나간 일들을 포함하여 목자이신 분들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이 있을 수 밖에 없었을 남편이 목자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아마 목자는 알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선선한 밤공기가 창을 타고 넘어 옵니다. 밤하늘로부터 밤의 대기로부터 가을을 느끼며 이런 저런 생각들이 더욱 떠오르는 것은, 요즘 더 부쩍 느끼게 되는 ‘부자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이란 글을 읽는 모든 사람에게, 또는 특정한 대상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만을 쓰는 것은 아닌 것일텐데, 나 스스로 제약을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는 회의들에 대해서 또 감정들에 대해서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은데 쉽게 그렇게 되지 못하는가 봅니다. 아마, 두려운 것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