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도 더 전의 미국, 두 개의 이민 가방에 넣어간 짐이 전부였던 지라 피아노는 꿈도 꿀 수 없었던 때에, 한 대학교의 음악대학 지하에 있는 연습실은 가끔씩이나마 남편을 졸라 음악에의 갈증을 잠시나마 풀 수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그 연습실에 갈 때면, 한 방에서 들리는 여자의 피아노 소리가 잠시 잠시 내 귀를 사로잡곤 했습니다. 바하의 평균율 곡집 제 1권에 담긴 스물 네 개의 프렐류드와 푸가를 그녀는, 지치지도 않는 지 늘 처음부터 끝까지 쳐 내려가곤 했습니다.
사실 그녀가 지치지 않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아주 가끔은 휴게실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지친 듯 그러나 미소를 띤 채로 앉아 있는 푸근한 몸집의 전형적인 미국인 여자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처음부터 끝까지 곡을 쳐 내려가곤 하던 그녀를 신기해했던 내가 이제는 자주 그런 일을 합니다. 어떤 때는 한 바퀴를 돌고 다시 돌아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매일의 일과처럼 바하의 곡들을, 쇼팽의 연습곡들을 번갈아가며 연달아, 또 때로는 베토벤의 일생이 담긴 서른 두 개의 소나타를 며칠에 걸쳐 처음부터 끝까지 쳐 내려가는 것입니다.
부분 연습으로 한 곡 한 곡을 연마할 때도 있지만, 보통은 그렇게 풍성한 음악의 세계를 그대로 만끽해 나가는 것을 훨씬 더 좋아합니다.
또 때로는 책장에 수북히 쌓인 피아노곡집들 중에서 좋아하는 작품들을 이 책 저 책에서 끄집어 내어 몇 시간이고 마음껏 쳐 내려가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음악이 주는 더할 나위 없는 풍성함과 자유의 여운 속에 지치도록 잠긴 채, 피아노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음악이 주는 풍성함에 잠기는 것을 아주 좋아 하지만, 요즘 들어 피아노 앞에서 내가 가장 행복해지는 시간은 이런 때입니다.
처음에 그것은 알고 있는 찬송가를 건반 위에서 자유롭게 노래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찬송가의 선율은 어느 순간, 마치 즉흥적인 악상이 떠오르듯 자유로운 반주를 동반한 연주로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때로 내 의지로 시작한 기도가 내 생각과는 달리 나도 알지 못하는 언어들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풍성함으로 쏟아져 내릴 때가 있는 것처럼, 의식을 지나지 않고 저절로 연주되는 듯한 그 ‘음악 속에의 잠김’은 몇 개의 은혜로운 단어들을 내 안에 담은 채, 십 여분 때로는 이십 여 분 이상을 계속되다가는 스스로 날개를 접듯 마감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내 마음을 주님께만 집중한 채로 맡기듯 하는 연주가 끝나면, 말할 수 없는 평안이 나와 나를 둘러싼 공간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가끔은 시작되는 음악으로서 찬송가나 복음성가가 필요치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저 의자에 앉아 건반 위에 손을 올려 놓으면 그대로, 곧바로 그 풍성함을 누리게 되기도 합니다.
그 신기함과 내가 누리게 되는 기쁨과 평안함을 돌아보면, 이것은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음악에의 사랑과 주님을 향한 마음이 함께 만나 어우러지는 지점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 자신의 생각이나 음악적인 지식, 즉 화성진행이라던가 화음이라던가 반복 또는 그 변형같은 것에 신경쓰지 않은 채, 자유롭고 두려움 없이 쏟아져 나오는 음악이자 찬양을 통해 누리는 풍성함은 다른 음악들을 연주하거나 음미할 때와는 전혀 다른 누림인 것입니다.
그런 충만함을 돌아볼 때면, 때로 나 자신 조차 잊을 때가 많지만, 나라는 존재 자체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고 누리며 사는 사람인지에 대한 자각과 함께 내 안에 주님을 향한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며 안도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때로는 나 자신 하나님을, 우리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 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뿐 아니라, 갖가지 다른 이설들과 말들, 사건들, 때로 존경하던 신앙의 선배이신 훌륭한 분들에게서 뜻하지 않게 보게 되는 암흑과 절망, 고뇌를 목도하며, 또한 또 세상사의 각박함 속에서 부대낌 속에서 지쳐가며 스스로 주님에 대한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닌지, 또 때로는 사랑했던 적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하게도 됩니다.
또 나의 '사랑'이 올바른 길에 서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두려움 마저 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다시 잠잠하게 내 마음 속에 있는 '순수한 사랑'이 밖으로 표현되어지던 지점들을 돌아보게 되면, 내 주 하나님을 사랑함에 있어 그 순수함에 있어서는 스스로 의심할 필요가 없었던 것임을 알게 됩니다.
어느 영상설교에서 한 목사님이 '하나님을 오해하지 말고, 이해하라'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기준,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 하나님을 생각하고 지레 짐작하는 오해를 범할 때가 있을 뿐 아니라 선한 의도를 가진 이웃을 오해할 때도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한 편, 자신 안에 있는 좋은 성품, 선한 의도, 선하게 사랑하고자 했던 마음 마저도 스스로 세상의 잣대나 비판, 또는 비난의 눈을 들이대며 오해할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타인에게서 뿐 아니라 자신 속에서도 그 선하고자 하는 마음, 선한 의도, 또 이웃을 향해 가지고자 하는 포용과 사랑의 마음을, 혹 실패할 때가 더 많아 좌절감이 들 때에 조차도 스스로 인정하고 사랑으로 이해하고 바라 보아줄 수도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 거하는 처음 사랑의 순수한 마음이 늘 존재하고 있음을 스스로 잊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때로 자신의 눈에 조차, 보이지도 마음으로 느껴지지도 않는 것 같은 공허함에 사로잡힐 때가 있을 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