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아침, 환승주차장에 차를 대고 셔틀을 타고 교회쪽을 향해 올라가다 보면 골목길의 한 켠에 자리잡은 까페의 이름이 눈에 띄곤 합니다.
미추호오.
아름다움과 추함, 좋아함과 미워함. 그 반대되는 개념이 실상은 서로 하나라는 것인지, 그 모두를 망라하는 ‘전체’를 의미하는 뜻인지 또는 종이 한 장 차이인 그 개념들은 사람의 마음이나 상황에 따라 가역적인 것이기도 하다는 것인지, 알쏭달쏭한 여운을 갖게 하는 까페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분명 사회의 어느 곳에는 있음에도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선망 속에서 벌어지곤 하는 한 '미인 대회'에서 크게 입상을 한 어여쁜 미녀의 이야기를, 다른 곳도 아닌 출석 교회의 ‘예배’ 동영상을 통해 보며 오늘, 잠시 씁쓸함이 느껴졌습니다.
유추되는 바로는 인간의 '미녀를 가늠하는 기준 또는 취향'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왔겠지만, 그 다른 취향에도 불구하고 ‘어여쁜’ 여인네를 뽑아 온 일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쩌면 역사시대 이전부터 행해져 왔을 일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성 지배적인 사회의 시각이라던가, 여성의 상품화라던가, 여성 일반의 인격성에 대한 모독이라던가, 서구적인 기준을 인간의 몸에 잣대로 들이대는 일이라던가, 또는 사회적으로 왜곡되어진 미와 더불어 많은 문제를, 특히 청소년들에게 긍정적이지 못한 영향을 야기한다는 주장들.
그런 오락적인 면으로 오용되는 여성성과 사회적 가치의 전반적인 저질화 등을 접어 둔다 치더라도, 여성의 미를 두고 '콘테스트'를 벌이는 행사 자체에 대해 나 자신 개인적으로도 긍정적인 시각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상대적인 것일 수 있고, 더우기 각자 가진 독특한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평가 기준을 세워두고 가장 '이쁜 자'를 뽑는다는 것 자체가 우습게 느껴지고, 또 그렇게 인정하고 인정받아서 무얼 하자는 것인지 도무지 납득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미인 대회'의 당선자들이 마치 자기 합리화 내지 자신의 미를 더욱 확장시켜 보아달라는 듯, ‘미란 내면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의미 속의 ‘내면’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확실히 알기 어렵지만, 나 자신 또한 정말로… 사람의 외모 보다는 내면의 세계가 훨씬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기에 그럴 것입니다.
더군다나 외모만이 너무나 출중하여 그 장점이 오히려 상대적으로 큰 단점처럼 보이는 사람을 보게 되면, 그것이 남성이든 여성이든 더 쉽게 식상해지곤 하는 것입니다.
동영상 속에서, 국제대회 참가를 두고 어여쁜 미녀는 세 가지 목적을 두었다고 말했습니다. 그 첫번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하더군요.
아무리 자신이 선 무대가 지금 교회라지만, 미인대회에 입상하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서로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말의 의미가 크리스찬인 한 사람의 개인이 상을 받고 높임 받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뜻으로 한 소리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습니다.
나 자신이야 각종 미인 콘테스트들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녀가 누릴 수 있도록 가지고 태어난 '축복', 또 스스로 노력하여 얻어낸 '결과물'들을 통한 세상적 기준의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꼭 그렇게 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또 어떤 의미에서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국위 선양을 하겠다는 것인지도 잘 이해가 가지 않지만, 얕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진정으로 뛰어난 깊이를 가진 ‘미의 사절’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 되어주기를 또한 진심으로 바랍니다.
목자를 비롯하여 지금 그녀에게 바쳐지는 사람들의 칭송이야 어떻든, 세월이 흐를수록 빛나는 진정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가기를 또한 바랍니다.
어제 저녁에는 잠시 예술의 전당에 들렀습니다. 색색으로 불 밝혀진 분수에는 시원한 물줄기가 음악 소리에 맞추어 춤추듯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옆 쪽의 공연장으로 들어가 한 켠에 놓인 팜플렛 몇 장을 훑어 보다가 낯익은 얼굴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십 수 년 전, 당시 피아노 음악이라는 월간지에서 표지와 기사를 통해서만 얼굴을 보다가 학교 캠퍼스 음대 앞에서 마주치고는, 마치 잘 아는 사람이라도 되듯 인사를 한 기억이 있는 여성 피아니스트였습니다.
여성임에도 남성 못지 않은 터치와 장대한 곡해석이 금세라도 펼쳐질 듯 하던 카리스마 넘치는 피아니스트. 그것이 내가 그 시절 본 그녀에 대한 첫인상이었습니다.
사진 속의 그녀는 많이 늙어 보였습니다. 잠시, 안타까움이 지나갔습니다. 이국 땅의 영화관에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영화 속의 화장기 없는 얼굴의 늙은 메릴 스트립을 보았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전체 여성을 망라하여 아름다움의 대표라도 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듯한 젊고 출중한 외모를 지닌 여성을 향해 쏟아지는 찬사를 영상을 통해 보면서, 나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여성은 어떤 사람인가를 되짚어 보는 가운데, 어제 본 그녀의 흑백사진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도 지금의 세상적 미의 기준을 만족시킬만 하지 않았고, 지금에는 세월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내게 앞서의 미녀를 향한 ‘요란한 떠받듬’과는 비교할 수 없는 ‘다른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었습니다.
곧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실제의 연주를 보며 삶을 지나온 그녀의 세월 만큼 충만해지고 원숙해진 아름다운 음악의 세계까지 볼 수 있게 해 준다면, 아마 나는 그녀에게 반하고 말 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