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주의 전에 갈 때면, 주님이 제자들을 향해 던졌던 질문이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
한국으로 돌아 온 이제는 타국에서 살 때에 내 마음의 한 쪽을 점령하고 있던 외로움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부분에서 헛헛함을 느낄 때가 꽤 많습니다. 그것은 마치 풍요 속의 빈곤과도 같은 것입니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라진 인터넷의 속도로 인해 접하게 된 영상물에서 또 직접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케이블 티비를 통해 수많은 설교와 말씀들, 간증들을 다양한 분들을 통해 많이 접하게 됩니다.
새로운 말씀을 접하게도 되고, 또 그러한 귀한 말씀을 전해 주시는 분들께 감사한 마음도 갖게 되지만 또 많은 경우에 우려감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시험으로써 재물이나 명예, 권력도 있지만, 대중들로부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를 선망하는 시대여서인 것인지, 사람들이 쉽게 빠지기 쉬운 유혹이 ‘인기’ 자체가 되고 있음을, 또 그것이 세상 속에서 뿐 아니라 주의 일을 하시는 분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그런 우려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주만 바라볼찌라' 하는 말이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도 바라봄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도 실제로는 그저 말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있어 보입니다.
어느 모로 보나 좋은 말인 듯 하지만 기독교의 진리는 아닌 말들이 공중파 방송을 통해 마치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 말씀인양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세상의 어떤 종교의 지도자나 또는 어떤 사람이 이야기해도 별 다를 것이 없을 덕담과 삶의 지혜에 관한 말들이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소란스러운 화면 앞에서 돌아서서 예배를 드리러 갈 때에도, 그 질문은 ‘너희는 주의 전에 무엇을 보려고 나가느냐’라고 바뀌어 들리는 듯도 합니다.
때로 나 자신 조차 그 ‘무엇’이 찬양이나 어떤 순서들에서 느끼는 '감동'이거나 '공연' 또는 말씀 자체가 아닌 말씀을 재미있게 전하는 '사람'일 때도 있는 것 같아 찔리는 가운데 나는, 그 무엇이 '주님'이어야 함을 안다고 대답합니다.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환호한 것은, 그 분으로 인함이지 주님을 태우고 가는 ‘나귀’로 인한 것이거나 그 행렬이라는 ‘이벤트’를 위함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사람 안에 계신 주님으로, 또는 성령님으로 인하여 그 사람이 빛이 나고 그 안에서 아름다움이 느껴질 때에 조차도 그 주체를 혼동해서는 안되며, 또한 타인들이 혼동하기를 바래서도 안될 것입니다.
한 편 홍수처럼 쏟아지는 말씀에서 순간 순간 은혜를 받기도 하지만 곧 허전함을 느끼게 되는 빈곤함에 대해서도 돌아봅니다. 오히려 말씀을 들을 기회가 별로 없었던 곳에서 더 충만함을 경험한 때가 많은 것과 비교도 해 봅니다.
그것은 우리 각 개인이 누구든 주님과 대화하고 교제할 직접적인 통로가 이미 만들어져 있음에도 주님 앞에 홀로 고독하게 무릎 꿇고 대면하는 시간을 갖기 보다는, 사람들 속에서, 말씀이든, 목자이든, 또는 신앙 공동체의 형제 자매이든, 사람들 속에서 감동을 얻고, 간접적인 신앙의 체험을 하는 정도로 신앙생활을 생각하는 풍조에 어느덧 익숙해진 것이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성령님이 한 사람의 개인에게 주시는 마음의 변화와 내적인 감동이, 사람들이 연출하고 쉽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감동과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면서도 그들이 보여주려는 감동 정도를 보고 마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도 같은 것입니다.
며칠 전, 설교에서 목자는 주님이 원하시는 성도는 '완전한 성도'가 아니라 '진실한 성도'라고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진실함...
우리는 보통 진실함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설정하지만, 누구도 들여다 보지 못할 내면의 깊은 면까지 들여다 보며 스스로에게 진실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어 보입니다.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의 눈을 의식하거나 또는 주변의 인정받은 사람들과 비슷해져야 할 것 같은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은 것이 사람인지라 자신 속에서 진실하게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는 간과해 버리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겉보기의 진실함, 겉보기의 신실함, 겉보기의 감동, 겉보기의 순종.... 이 모든 것은 아름다와 보이지만 경계해야 할 '진실하지 못함'의 일부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겉보기를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풍조가 우리의 신앙 안에도 깊숙히 자리잡고 있음을 깨닫게 될 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