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에 들어가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대 여섯 명으로 구성된 동기들 중에 남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청일점이었던 셈인데, 별로 말도 없고 눈에 뜨이는 점도 없는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어느 날, 강의실에 도착해 보니 그 학생만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 날 제출해야 할 과제물에 대하여 내가 무언가 물었습니다. 그 때까지는 서로 개별적으로 인사를 나누어 본 적이 없으니 처음으로 말을 하게 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은 채로 얼굴만 벌개져서 잠시 가만히 있더니, 결심했다는 듯이 내게 “저는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물은 것은 레포트에 관한 것인데, 돌아온 황당한 대답에 놀랐다는 표정 조차 짓기가 어려웠습니다. 벌어지려는 입을 다물고 있으려고 애쓰는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엉뚱한 대답을 해 놓고는 거기에 덧붙여, 자신이 생각해도 참 용기있게 잘 말했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얼굴을 돌려 거의 부동자세(?)로 앞만 똑바로 보고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이 차라도 한 잔 마시자고 제안했다가 거절당한 남자 쯤으로 여겨진 것처럼 황당하기 그지 없는 상태로 나 자신 역시 앞만 쳐다 본 채로, 도대체 이 남자는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이상한 반응을 보일 수 있는 것일까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딴 세상에서라도 온 사람처럼 구는 이 이상한 남자는, 혹 남자들만 다니는 대학교가 있어서 그런 데에서 공부하다 온 사람인가, 여자와는 이야기도 나누어서는 안 되는 규칙이라고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
그러다가 문득, 첫 시간 자기 소개 시간에 자신이 크리스찬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이야기하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 시절 나는 교회에는 가끔씩 가족을 따라 가 보는 것이 전부였던지라, 그 남자가 다들 이야기하는 ‘독실한 크리스찬’에 해당하는 사람이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그 후 무슨 일로 생각이 바뀐건지 자신이 먼저 이야기를 걸어올 때가 있었는데, 나는 거의 대답도 제대로 하지 않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과다할 정도의 깨끗함과 정절을, 또는 종교적인 엄격성을 지키려는 태도이든, 또는 질문을 질문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든, 서로 다른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볼 수 있을 ‘황당한 어긋남’인 것이지요.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빚어지는 오해도 있겠지만, 말 또는 글을 겉보기로만 볼 때에 빚어질 수 있는 오해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런 오해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 때가 있더라도 그렇다고 일일이 설명하고 해명하기 어려운 것도 현실이겠지요.
마치 배경처럼 깔린 그 무엇이 때로는 글이 표현하고자 무엇이 될 수 있음에도, 글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겉보기의 작은 사안에 신경을 곤두세우거나 집중하다 보면, 원하고 했던 바 ‘주인되시는 분’에 관한 이야기는 간과되어 버리고 말 수 있다는 것, 그것에 대해 조심스러운 마음이 드는 날입니다.
다시 나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오해를 받을 수도 있겠다는 것이지요. 또 내 의도와는 달리 누군가에게는 오해와 피해의식을 야기할 수 있더라도, 또 그것으로 인해 내게 화살이 돌아 오더라도… 그것을 감수해야겠지요..
'예배란 무엇인가'
오늘의 말씀 중에 그런 물음이 있었습니다.
예배란 무엇인가..
목자는, '예배란 춤추고, 소리지르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향한 기쁨을 마음껏 드러내며 찬양하고 외치는 것이다…라는 뜻이겠지요.
사실 ‘예배란 무엇이다’라고 이렇게 저렇게 단정하듯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떤 강조점이나 깊은 인상을 주려다보면 과한 단어를 사용하게 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선입견을 심어줄 만큼 지나치게 단순화된 문구의 남발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배란 무엇인가...
그 질문은 이전에 한 목자가 소그룹으로 모인 사람들을 향해 물은 것이기도 했습니다.
육십이 넘은 한 여자가,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한 대답으로 모인 사람들을 잠시 놀라게 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입맞춤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 모임에는 남자들도 몇 명 있었는데, 모두가 머쓱한 표정을 짓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쉽게 침묵을 깨뜨리려 들지 않자, 그녀는 조금 어눌한 감이 드는 한국어로 다시 말했습니다.
“정말이에요, 독일 교회에서 그렇게 배웠어요.”
그 때는 나 역시도 그녀의 대답에 놀랐던 것인데, 가끔 그 말을 떠올려 볼 때가 있습니다. ‘입맞춤’이라는 서양이나 우리나라의 사고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는 것이긴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사랑의 표현이며 친밀감을 의미하는 것이겠지요.
나 자신은 그 물음에 대해 '예배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던 듯 합니다. ‘예배는 춤추고 소리지르는 것’이라는 말에는 전혀 동의하지 않지만, 그것 또한 찬양과 경배를 의미하려는 것이라면 비슷한 맥락의 말이 될 수도 있겠지요.
지금의 나는 사실, ‘예배란 무엇이다’하는 정의가 아닌, 예배시간에 내가 누리고 싶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과 나누고 싶은 ‘친밀감’입니다. 또는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겠지요.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가고 싶다는 것..
결국 돌아보면 다 같은 이야기일까요? ^^
말씀을 듣는 중에든, 찬양 중에든, 또는 자리에 앉은 성도들의 모습 속에서든, 어느 순간 그 분이 느껴질 때에 내 마음에 가득히 차오르는 평안과 조용한 기쁨. 그 모든 것 또한 내가 누리고 싶은 ‘예배’의 일부분들인 것입니다.
오늘 예배의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순서는 무대 위로 화려하게 휘날리는 국기들의 물결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되자, ‘무엇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기도하자’는 방향이 목자를 통해 주어졌습니다.
그 ‘기도하자’는 정해진 방향과는 다르지만 나 자신도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것이 확실히 무엇인지는 나 자신도 알 수 없는 언어로, 그러나 그 방향이 무엇을 향한 것인지는 짐작한 채로, 그들을 위해, 또 내가 생각하는 더 큰 무엇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두고 정의를 내리듯 다른 단어들로 표현하지만 결국 같은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처럼, 방향은 다르지만, 그 목적도 중심도 분명 같은 것일 겁니다. 그렇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