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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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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지는 게임


BY 플러스 2007-04-02

짧은 글과  그림들을  모아 엮은 미국  작가의 책에서 아홉 개의  모자를  쓴 남자와  한 개의  모자를    남자라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길에서  마주친  글 속의 두 남자는,  한 개의 모자를 쓴 남자의 모자 마저 아홉 개의  모자를 쓴  남자가 쓰게 된 채로 각자 제 길로  갑니다.

 

그림  속 남자의 표정이나  글의  분위기로 보아,  긍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던 듯 합니다.  오히려 생의 모순과 우울함을  유머 속에서 슬쩍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고 여겨집니다. .

그런데, 오늘 그 이야기가 제게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고 떠오릅니다. 아홉 개가 아니라 아흔 아홉 개쯤의 모자를 가졌다 할 정도로 충분한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 필요했던 나머지 한 개의 모자를, 나 같이 부족한 인간의 작은 반응 하나, 작은 비판의 시각 하나로 갖추게 하시려 하시는 듯한 하나님의 뜻이 기이하다는. 


 주일인  어제의 예배시간은 내게  깊은  우려가 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입을 뗄 때에 조차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들어야 할 귀한 일복된 소식에 대하여 그것이 듣는 대중이라는 것을 두고더군다나 그 대중의 수준을 낮추어 본 시각에서 값싸게 쉽고 소프트하게 가공시켜 시중에 대량으로 유포하는 것이 일차적인 것처럼 보이는 가볍고 쉬운’ 언어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귀한 도구인 이성을 도외시하라고도 하고  또, 무조건 믿음이 전부이니  그저 공짜로 와서 믿고 그 축복을 먹고 마시라는 가벼운 말들의 홍수 속에서, 깊이 우려하는 마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가볍고 입에 걸리는 것 하나 없는 인스턴트 죽 같은 말들로 일관되는 이야기 속에서진리의 일부가 마치 진리 전부인양 왜곡되어진다고 느껴지는 것.  무엇보다도.. 귀한 진리가 함부로’ 다루어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  그런 말 뒤에 진리’ 보다는 자신을 의지하여 버티고 있을 자신만만한 마음의 자세가 보이는 듯하여 마음이 불편해왔던 것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신 말씀은 우리가 ‘어린 아이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함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진리는 어린 아이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어린 아이와 같은 수준의 사고로 받아들임만으로 만족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의 세계나합리적인 사고이성적인 세계관은 결코 진리와 동떨어진 것이거나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의  발이  올바른  방향에  서서,  인간이 가진  이성과 사고를 통해 스스로 반성하며 진리 안으로 들어갈 때에우리가 가진 한계인 사고와 회의를 넘어 빛나는 진리의 세계로 더욱 가까이 더욱 확고하게 다가갈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그것은어린아이처럼 그저  단순하게 믿어서 보는 진리와도 다른,  스스로의  한계를  넘어 선 지평 속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세계일  것이라고도  여깁니다.

 

스스로  사고하고  회의하는 어려운 과정은 다 생략한 채,  푸른 바다에서 생동하던 실제의 생선의 모습은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뼈도 가시도 다 발라 먹기 좋은 살점만 먹기 좋게 입에 떠 넣어주는 어머니에게 길들여진 아이처럼,  이것 저것 다 빼놓은 채 가공되어 가장 부드러운 부분만 먹고 자라는 성도들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도 들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분들이 대다수의 성도들이 원하는 것은 바로 그 정도라고 여기게 된다 하더라도 말이지요.

 

설교 말씀이 전해지던 위성화면이 지나가고 단상에 선 담당목자를 보았습니다. 

 

말씀을 전한 것은 단 위에 선 목자가 아닌데  내게 든 회의와 실망 섞인 물음과  나무람같은 것이한 편으로는 의아함으로 또 한 편으로는 마음을 읽으려는 살핌으로 마주친 눈을 쉽게 떼지 못하는 목자에게로 향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긴 마주침은 첫 날의, 기이할 정도로  ‘이상한' 마주침 이후로는 처음이었습니다.  사실상, 그간 나 자신이 피해 온 것이기도 했구요.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가끔 나의 이런 작은 움직임이 어떤 분들에게는 큰 파동을 일으키기도 하는예전에는 없었던 일이 몇 년 전의 일 이후로 가끔 일어나게 되는 것을 보게 되는 터라,  워낙에 마음의 생각이나 감정이 표정으로 잘 드러나버리곤 하는 사람인 나 자신이  조심성이 부족한 사람인 것만 같아 책망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곧 다음 시간대의 '비중이 큰 예배'  또한 준비하셔야 할 목자에게 기쁜 호응과 감동을 보여주는 성도가 아닌물을 끼얹는 성도가 된 것 같았던 것입니다.  감성적인 면이 약하다고 할 만큼  풍부한 분임을 느끼기에 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조금 전인터넷 방송으로 어제 있었던'다음 예배'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두려움이 보이는 가운데에서 오히려  진지하고 마음을 진실되게 드러내 놓으려는 아름다운 목자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진심으로 마음을 통해 들어오는 낮아지고 아름다운 마음의  기도’.

 

그것은 한 사람의 눈에 뜨이게 된 성도를 알아주고 인사하려고 했던 날그 호의를 두고 냉정하게 몸을 돌려 가버린 그 사람을 통해 느낀 마음의 상처’ 가운데에서, 자신 안에 쌓인 다른 상처들을 돌아보시며 상한 심령으로 하셨던 기도그리고 그 두 번 째로 내 마음을 뚫고 들어오는 아름다운 기도였습니다

 

내가 가지는 회의라던가  비판의식...들을  잠시  돌아봅니다.

 

가끔씩 나는 그것이 내  좁은  마음에서만 오는 것이  아닌지 반성하고   반성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억누르려고 할 때 오히려 나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그리고 주님은 그렇게 회의하고 비판하는 나를 나무라지 않으신다는 것,  회의가 들지 않는 듯 가장하느니 차라리 무모함으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라도 질문하고 대답을 찾아가는 태도를 더 나답게 여기신다는 것은 알 듯합니다.

 

잔잔한 감동 가운데에서, 내 자신 속에 드는 회의와 비판의식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백에서 아흔 아홉은커녕 백이 다 부족할 나 자신은, 타인에게 부족한 ‘하나’를 찾아내기 쉬운 사람인가 본데, 그 부족한 ‘하나’조차 주님의 섭리를 통해 메워가게 하심을 보게 하시니, 아마 주님은 날마다 나를 이기시고, 회의하는 나는 날마다 지는 게임을 하게 하시는 분인 모양입니다.


평상시의 들뜬 모습과는 달리,   낮고 차분함 가운데에서 열린 마음에서 울려 나오는 목자의 기도하는 모습을 잠시 본 나는 행복합니다.  내게 들던 비판과 회의도 잠시 다 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