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의 집은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가는 이 십 여 분간 어느 누구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영선 또한 머릿속을 맴도는 질문들을 꺼내 놓지 못했다.
동기들의 움직임을 따라 동수도 호수도 의식하지 못한 채로 그저 움직이면서 도착한 정인의 집은 조용했다. 몇 사람의 모습이 보이기는 했지만 별 다른 슬픔이든 무엇이든 감정의 동요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조용했다.
거실의 소파와 바닥에 나란히 앉은 영선과 일행들에게 한 여자가 음료수를 내어오고는 몇 마디의 인사말을 한 뒤 방으로 사라졌다. 거실 앞 큰 방에서는 간간히 작은 웃음소리 마저 들려왔다.
조용히 앉아 있던 태영이 일어서서 사람들이 모여있는 큰 방에 들어갔다가 곧 다시 돌아왔다.
" 아버님은 지금 안 계시대. 어디 나가 계신가 봐. "
태영이 자리에 앉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누군가가 말을 꺼냈다.
" 그럼 이제 그만 가자. "
그 말을 따라 모두가 조용히 일어서는 것에 영선이 놀라며 함께 일어섰다.
음료수를 내어 왔던 여자가 다시 거실로 들어섰다.
"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
태영의 목소리가 침착한 정도가 아니라 무감각하게 조차 들린다고 여기며 영선이 여자를 바라보았다.
" 네에. "
여자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를?'
영선이 어리벙벙한 채로 일행의 뒤를 따랐다. 여자는 잦고 빠른 걸음으로 일행을 앞서더니 현관과 가까운 쪽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
" 어머니. 정인이 친구들인데요. 왔다가 지금 간대요. "
여자의 목소리에는 어두운 곳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열려진 문으로 커텐이 쳐져서 어둑한 작은 방의 안 쪽에 깔린 요 위에 누워 있던 한 여자가 몸을 일으키고, 그리고는 손과 무릎으로 기듯 천천히 요 앞 쪽으로 몸을 옮겨 앉는 모습이 들어왔다.
태영과 한 아이가 문 안으로 들어서고 영선과 다른 일행은 문 밖에 섰다.
태영이 여자 앞에 앉으며 말했다.
" 어머니, 저희는 정인이랑 같은 써클 친구들이에요. "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앉아 있는 듯한 중년 여인의 얼굴이 점점 더 또렷하게 영선의 눈에 들어왔다. 아직 고운 기가 남아 있는 초췌하고 앙상한 그녀의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한 눈만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태영의 말에도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붉게 짓무른 눈은 초점을 잃고 황망한 물기만 감돌 뿐이었다.
그 말 외에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앉은 태영에게 한동안 눈을 두고 있던 여자의 눈이 주위에 둘러 선 일행을 하나하나 천천히 바라보기 시작했으나 곧 찢어지는 듯한 고통으로 일그러지며 몸이 뒤로 젖혀지듯 흔들렸다.
그러나 그녀는 울지 않았다. 마치 울 수 없는 사람처럼, 울음 소리를 내어서는 안되는 사람처럼 마지막 순간에 그 뜨거운 물을 삼키는 그녀의 몸에 거친 전율이 지나갔다. 앞 뒤로 흔들리는 그녀의 몸은 금세라도 바스라질 바싹 마른 나뭇잎같았다.
그 모습은 영선의 마음을 너무나 아프게 했다. 세상에서 슬픔과 고통으로 온 가슴이, 온 창자가 가닥가닥 끊어지고 문드러진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바로 그런 모습일 것 같았다.
얼굴을 치켜든 채로 두 눈을 꼭 감고 울음을 삼키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점점 핏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소리없는 눈물이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영선이 방으로 들어서서 그녀 앞에 앉았다. 그녀의 손을 두 손으로 잡은 영선이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면서 말했다.
"어머니, 슬퍼하지 마세요. 저희들이 있잖아요. "
그녀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영선을 바라보았다. 딸의 또래아이인 자신을 보며 더 슬퍼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어리석은 말을 한 것은 아닐까 두려워하며 영선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영선의 두려움과는 달리 그녀가 영선의 손과 눈을 마주한 채로 감정적인 격정에서 벗어나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입가는 억지로라도 미소를 띠어 보이려는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고운 얼굴이었다.
정인의 집을 나선 동기들은 여전히 무거운 모습이었다. 슬퍼한다기 보다는, 정인의 어머니의 슬픔에 가슴 아파한다기 보다는 마음에 짐을 하나씩 진 듯 무거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한참 만에야 태영이 입을 열었다.
" 정인이는 사고나 병으로 죽은 게 아니야. "
"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렸대. "
놀란 영선이 다른 동기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영선의 머릿속으로 정인의 어머니의 고통스럽게 일그러지던 얼굴이, 그녀가 느꼈을 충격이 그림처럼 지나갔다. 태영은 침착한 어조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정인이 어머니는 친어머니가 아니야. "
" 정인이 친어머니는 정인이가 고등학생일 때에 돌아가셨대. "
" 정인이 아버지가 일 년 쯤 전에 재혼을 하셨던 거지. "
" 정인이 방에서 유서가 발견되었대. "
" 세상은 너무나 더럽다고. 자신은 더럽고 추악한 세상에서 자꾸만 물들어 가는 것을 견딜 수가 없다고. 그래서 순수함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 때에 떠나겠다고.. 그랬대. "
조각조각 이어지는 태영의 말들이 퍼즐조각들 처럼 영선의 머릿속을 어지럽게 이리 저리 돌았다.
" 정인이가 막내여서 더욱 친어머니가 너무나 그리웠던 모양이야. "
태영의 조각조각난 말들을 통해 들은 정인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영선은 쉽게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세상이 더럽고 추악하다고? "
" 혹시 정인이가 데모에 가담하고 그러던 아이였니? "
영선이 태영에게 물었다.
" 아니. 그런 쪽의 의미는 아닌 거 같아. "
" 그럼, 무슨 뜻이지? 아버지가 재혼한 것과 관계가 있다는 것이니? "
" 알 수 없지. "
" 아마 우울증을 앓고 있었던 것도 같아. "
태영이 조용히, 덧붙이듯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