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소식을 전해 듣고, 사정을 잘 알만한 한 여집사님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한국의 본교회로부터의 소환 명령과 불응, 그리고 제적에 이르는 처분 그리고 그 후의 분열 등에 대하여 간단하게 설명하는 그녀는, 어떤 직접적인 원인이라도 있었던 것인 지를 묻는 내게, 그간 쌓여 온 내부의 문제들을 일일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하나님이 그 분이 그 자리에 서 있도록 두시고 싶지 않은 것처럼, 어떤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고
한 교회를 떠나오고 나서 일 년 만에 듣게 된 소식을 두고, 나는 마음이 착잡해왔습니다. 가장 먼저는 목자를 대상으로 하여 반기를 들게 된 성도들에 대하여, 그리고 권위에 불복하기는 마찬가지가 된 목자에 대하여, 그들이 겪어왔을 고통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움이 드는 것입니다.
안개 속을 헤매는 듯, 그저 미루어 짐작할 수 밖에 없는 옛 교회의 모습들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다가 .. 하나님이 목자를 그 자리에 두기를 원하시지 않는 것처럼... 이라는 한 집사님의 말을 두고, 나의 시선은 점점 더 나 자신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를 찾는 자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는 주님이시나, 결코 우리의 죄를 묵과하시는 법이 없으신 주님이라는 생각 앞에 두려움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은 내가 주님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만한 지지대가 될 만한 것이 있는 지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행위의 의로움도, 마음의 정결함도, 믿음의 단단함도, 주를 섬기려는 열성도, 그 어느 것도 주님 마음에 드시도록 조금이나마 내 보일 것이 없으니, 이런 나 자신은 어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하는 마음인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는 것처럼, 주님이 오심은 의인을 부르러 오심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오심이라 하셨지만, 한 번 죄사함을 받고 주의 자녀로 살겠다고 결심한 후에도 늘 날마다 넘어지고 깨어지는 자신을 생각하면, 끝없이 날마다 주의 십자가와 보혈의 은혜에 의지해야 하는 존재라는 자각에 주님을 뵈올 염치 조차도 없어지는 자신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나마 그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주님 앞에 서게 할 용기를 내게 하는, 주님을 향한 '작은 사랑'을 주신 주님께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오늘 아침 전해들은 한 목자의 소식은 하루 종일 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의 반대 편에서 생각해 보자면, 우리 부부가 그 교회를 떠나 온 것은 그가 저지른 실수가 우리로 하여금 그 곳에 더 이상 머무를 수 없게 하였기 때문이니, 이미 이전에 다 용서하였다 하더라도, 나는 어쩌면 냉정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C.S 루이스가 한 책에서 그렇게 말한 것이 떠오릅니다.
주님은 죄는 미워하되, 그 죄를 지은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나, 죄를 미워하면서, 죄를 지은 사람을 더군다나 그것이 자신을 향한 것일 때에 어찌 미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 불가능한 일을 명령하신 말씀을 다시 돌아 잘 생각해보면, 내 평생 그 저지른 숱한 죄들은 미워하면서도, 정작 그 죄를 지은 사람은 미워하지는 못했던 사람이 한 사람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곧 나 자신인 것이다.
루이스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기독교적 관념에 관하여, 이웃이 지은 죄된 속성, 그 죄는 미워하되 그 죄를 지은 사람은 미워하지 않으며, 그가 그 죄로부터 떠나기를 바라며 안타까와 하는 것, 그것이 곧 '사랑'임을 이야기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에, 자신에 대하여 선하지 못한 행동을 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생각만큼 심히 어려운 일은 아닌 모양입니다. 내 생각과는 달리 나 또한 이미 그런 면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던 것인 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