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연주 음반을 듣고 난 직후 내 피아노를 열면 그 둔탁한 소리에 흠칫 놀랄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연주 음반들에 사용되곤 하는 스타인웨이 앤 썬즈 피아노의 음색에 익숙해 있던 귀가 갑자기 달라진 음색에 적응하는 데에 잠시 시간이 걸리는 것이지요.
결혼 이후 줄곧 사용한 삼익 피아노가 예서 고장이 많이 난 것이 이 년 쯤 전이었습니다. 한국에서라면 조율사 아저씨들이 톱을 들고서라도 고쳤을 것을, 독일에서는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정교한 기계 장치라도 되는 양 피아노를 다루는 이들은, 몇 명의 조율사를 불렀음에도 수리 불가능 판정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해서 피아노 한 대를 새로 장만하기 위해 시내의 중고상을 비롯한 피아노 판매점을 다 돈 적이 있습니다. 독일에서 가장 큰 피아노 회사인 쉼멜 피아노에서 부터, 가장 작은 회사라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긴 이름의 피아노까지 수 많은 종류의 피아노들을 만져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내가 꼭 가지고 싶었던 피아노가 있었습니다.
각 회사의 피아노마다, 또 각각의 피아노마다 음색도 터치감도 다 다르게 마련이지만, 스타인웨이의 음색은 타 모든 회사의 피아노와도 확연하게 구별되는 점이 있었습니다. 스타인웨이 매장에 들어서서 수많은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다 만져보고 놀란 것은 그 모든 피아노들이, 마치 다 한 얼굴을 가진 것처럼 다 같은 피아노처럼 느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만큼 그 독특함이 뚜렷하게 구별되는 것임을 말해 주는 것일 터입니다.
어떻게 보면 천편일률적이어 보일만큼 개성이 너무나 뚜렷하게 구별되는, 그리고 그 안에서는 어떤 것이든 똑같아 보이는 음색인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가진 매력을 낮추는 것이라고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내게 가지고 싶은 피아노를 하나만 대라고 한다면, 뵈젠도르프가 가진 저음의 풍부한 울림에도 불구하고, 스타인벡이 가진 우아하고 유려한 음색에도 불구하고, 그 화려함이 때로는 가벼이 보일지라도 스타인웨이를 고르게 될 것입니다. 더군다나 모짜르트의 '사냥'이라는 부제가 붙은 소나타를 연주하던 날, 그 세번 째 악장의 고음까지 올라가는 연속되는 아르페지오 부분에서 연주회장을 짜릿하리만큼 쨍하고 꿰뚫고 지나가던 음향감을 잊을 수가 없는 내게는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나, 가격이 문제였습니다.
삼 대 째 피아노 조율과 판매를 겸하고 있는 독일남자의 가게에서 탐이 나는 스타인웨이를 보았습니다. 작은 홀에 사용될 수 있을 크기의 그 피아노는 15년 된 중고였으나, 새 것과 다름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프랑크푸르트의 부자가 가지고 있었던 그 피아노는 주인 자신은 연주를 할 수 없으나, 일 년에 몇 번 피아니스트를 초청한 만찬에 사용하는 용도로만 사용된 피아노였다고 합니다. 새 것과 다름 없는 상태인데다가 가격은 훨씬 낮았지만, 그 가격 조차도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높은 것이었지요.
그 날 밤, 나는 그 피아노를 가지게 되는 꿈을 꾸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피아노는 독일 인터넷 옥션을 통해 알게 된 판매점과 연락하여 사게 된, 뮌헨에서 온 튼튼한 야마하입니다.
음반을 들을 때면 보통은 음악의 연주 상태에 집중하지만, 때로 스타인웨이의 음색에 더 많이 주의가 기울여지는 때가 있습니다. 맑고 청명한 가을 하늘같은 소리의 세계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