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가 놓여져 있는 거실은 식당과 부엌이 연결되어진 오픈된 공간입니다.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연습을 하다가 때로 찬송 또는 복음찬송 몇 구절을 치곤 할 때가 있습니다. 흐르는 선율 안에서 잠시 마음의 평안을 느끼며 도중에 자연스럽게 나의 눈이 닿곤 하는 곳은 식탁이 놓여져 있는 벽에 걸린 그림, 더 자세히는 그 그림 중앙에 앉아 계신 예수님입니다. 그것은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으로 나무 위에 사진이 프린팅되어진 것입니다. 그 그림을 볼 때에 나는 그림을 산 아씨시의 평화로운 정경 안에서 느꼈던 경건함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듯 할 때가 있습니다.
완만한 구릉같은 산지가 끝없이 고요함 안에서 펼쳐지는 이탈리아의 움부리아주의 한 도시, 아씨시가 오늘날의 정결함과 신성함에로의 사색으로 인도하는 곳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 전반기의 역사 안에서 살았던 성 프란체스코로 인함일 것입니다.
유복한 상인의 아들로 아씨시에서 태어나 물질적인 부족함이 없이 살았던 그는, 25세 무렵 회개의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평화의 중재자로서 또한 그리스도교의 전파자로서 평생을 청빈함과 나눔 가운데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대우주 만물들을 형제 자매라 부르며 그 지으신 창조주를 찬양하는 찬미가를 남기기도 한 , 전설과 역사 가운데에서 그 이름을 떠올리게 되는 프란체스코의 발자취는 아씨시의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도시의 곳곳, 광장과 거리 집들 뿐 아니라 초목이 우거진 들녘들 안에서도 성자의 삶을 고요함 속에서 사색해 볼 수 있을 터이지만, 아씨시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곳은 그의 유해가 묻힌 곳일 뿐 아니라, 13, 14 세기 '위대한 이탈리아'의 '부흥'으로 이끄는 르네상스의 문을 열게 한, 당대의 최고봉들이라 할 예술가들의 천재적인 손길에 성 프란체스코를 기념하려는 영적인 힘이 더해져 이루어진 아름다운 기념물이기도 한 성프란체스코 성당일 것입니다.
곧 보게 될 지오토의 벽화를 고대하며 떨리는 마음으로 들어 섰던 성당은, 사람으로 하여금 깊이 내부로 침잠하게 하는 듯한 경건한 고요함이 가득했습니다. 낮은 천정들은 단순한 고딕의 양식으로 뼈대를 아치모양으로 드러낸 채 짙은 파란색으로 밤하늘과 별들이 그려져 소박함과 함께 아늑함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 하늘의 깊은 아름다움은 또 한편 '자매인 달과 별'을 노래하던 자연 속의 성자의 모습도 떠올리게 했습니다.
성자의 일생을 주제로 하여 그려진 지오토의 프레스코벽화는 부분부분 낡고 색이 바랜 세월의 흔적 안에서 단순하되 아름다운 조화를 잃지 않은 자연스러운 기품이 느껴지게 했습니다. 성경 속의 상징들과 성자의 삶을 상징하는 다양한 알레고리로 그려진 형상들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현상들 마저도 전혀 자연스럽게 다가오게 할 만큼 성자를 기념하는 대가의 정성스런 손길 안에서 그림 속으로 녹아든 듯 보였습니다.
두어 명의 신부님이 관리하고 계셨던 성당 옆 쪽의 기념물 코너에서 지오토의 그림이 그려진 무언가를 살 수 없었던 것은 유감이었습니다. 그 대신 선택한 것이 마침 눈에 뜨인 다빈치의 그림이 그려진 나무였습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는 모습을 그린 다빈치의 그림 속에서의 자연스러운 조화와 경건함이 느껴지는 분위기가 그 곳의 분위기와 잘 어울려 보였습니다.
그림을 고르고 있던 내게 다가 온 남편은 내 머리 주위가 밝게 빛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이상한 듯 내 머리 주변을 살폈습니다. 그 곳에서 내가 느꼈던 주님에게로, 또 그 주님을 사랑하며 평생을 살다 간 성자에게 집중하던 마음이, 또는 남편이 그 곳에서 느낀 경건함이 그런 현상을 본 듯하게 한 것인 지도 모릅니다. 혹은, 성자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 또 그를 기념하고 본받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 안에서 그 곳을 귀하게 여기시는 분의 섭리가 특별히 머문 곳이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잠시 남편에게 보여졌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