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위성방송을 통해 태국의 교회를 섬기러, 즉 선교사로 떠나는 젊은 부부를 보았습니다. 역시 선교사이자 목사님이었던 아버지를 본받아 태국의 교회에서 의술을 통한 섬김을 하러 떠나는 것이었지요. 떠나기 전의 준비를 하는 중에 취재한 것과 그들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화면만을 통해서도 순종과 봉사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이 전해져 왔습니다.
그들 부부는 나로하여금 세상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지는 삶을 살고 있음을, 그 쉽게 잊기 쉬운 사실을 잠시 생각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분들을 바른 시각으로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 실상은 너무나 다른 사람들 또한 생각하게 됩니다.
인터넷의 한 코너에서는 벌써 5년 째 매주 독거노인들을 위한 떡잔치를 벌여오고 있다는 크리스찬인 한 떡집 주인의 이야기가 눈에 뜨입니다. 제 2차대전의 전범 중의 한 사람을 재판정에서 대면한 한 사람이 '악의 평범함'에 기절을 할만큼 충격을 받았다고 했던 글을 본 것이 기억납니다. 그러나, 또 한 편 선함과 아름다움 역시 우리의 일상 속에 평범한 얼굴을 한 채로 함께 있음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단지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은 조용함 가운데 묻힌 채 드러나기가 쉽지 않을 뿐일 것입니다. 그 작고 조용한 선함과 아름다움의 생각들, 행위들이 이 땅 위에 우리 인류가 아직 존재하는 이유이며, 하나님의 오래참으심과 사랑, 용서, 축복이 이 땅 위에 남아 있는 이유이자 그 통로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또한 그 평범한 사랑과 선함의 길, 그 아름다움의 길 가운데 서 있을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일인 어제, 삼 주 만에 R 교회를 찾았습니다. 휴가기간에 겹쳐진 두 번의 주일과 예배시간을 맞추지 못한 또 한 번의 주일로 인해서였습니다.
아침 시간, 한적하기 그지 없는 도시의 거리를 달려가면서 내게 유난히도 교회, 또는 성당들의 첨탑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샌가 잊고 있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습니다.
독일에 와서 처음 맞는 겨울, 크리스마스를 며칠 남겨두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금요일이었던 그 날, 우리 가족은 프랑크푸르트 시내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한 교회 앞에 사람들이 모여 서 있는 것을 보았지요. 궁금해서 들여다보니, 그 곳에서는 곧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가 연주될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손에 입장권을 들고 있었고, 표를 살 수 있을까 하여 물어 본 안내원에게서 이미 매진된 상태임을 듣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연주되는 공연은 어떨까 하는 마음에 쉽사리 발길을 돌리지 못하고 서 있던 우리 부부에게 갑자기 한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지금보다 더 독일어 실력이 없던 때였을 뿐 아니라 나직하게 몇 마디의 단어로만 이야기 한 그 남자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남자는 자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편의 손에 무언가를 쥐어 주고는 사람들 속으로 사라져버렸습니다. 그제서야 그가 두 장의 입장권을 우리에게 준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미처 고맙다는 말 조차도 할 겨를도 없이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버린 후였습니다.
두 장의 표를 받아들고 어리둥절한 채로, 그리고 그리 큰 돈도 아니지만, 결코 작지도 않은 가격의 표를, 그리고 우리에게 값없이라는 의미보다도 , 우리가 누릴 수 없었던 기회를 우리부부에게 주고 간 그 독일남자에게 감사함과 그 감사함을 이야기하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가진 채로, 그 연주를, 경건한 예배당 안에서 보았었습니다.
그는 혹 누군가와 공연을 보려고 기다리다가 그 누군가가 오지 못하게 되자 혼자 볼까 말까를 망설이고 있었던 것인 지도 모릅니다. 또는 그저 여분의 표 한 장을 가진 채였다가 자신의 표를 포기한 채 우리에게 준 것인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그가 운집한 많은 사람들 속에서 어떻게 우리를, 그것도 우리의 사정을 알게 되도록 지켜보았으며, 그렇게 주고 갈 마음이 생기게 했던 것일지요.
내가 만일 내가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주려고 할 때에, 대가도 없이 선뜻 내어줌 뿐 아니라, 고맙다는 인사조차 기대하지 않음이 가능할까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만난 또 다른 독일인들에 대하여도 또 잠시 생각했었습니다. 매 주 예배에 정기적으로 출석할 뿐 아니라 자신을 크리스찬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독일인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에 불과한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는 정신의 기초, 문화의 기본 바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이들의 정신과 영 속에 자리잡은 그리스도의 영에 의한 존재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들과 이들 사회의 정신을 이루는 근간이라고 말이지요.
R 교회에 도착하니 여전히 맑은 얼굴의 목사님이 중앙의 커다란 십자가 옆 쪽에 놓인 강대상에 서 계셨습니다.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 여행한 성지 순례에 대하여 잠시 이야기를 하기도 하셨습니다. 세상의 학문과 지혜 그리고 웅변술이 뛰어나던 초기의 바울과 고린도 후서에서 나타나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려는 약함과 떨림 속의 바울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 안에서 자신의 약함을 돌아보고자 하는 목사님의 맑음 속에서 약한 떨림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향하는 시선을 보았습니다.
경건함과 온유함, 겸손함이, 흉내내어지는 것과 본래 그런 모습으로 비쳐나옴과는 전혀 다른 것일 터입니다. 나는 그런 일들이 겉보기에는 그럴싸하도록 흉내내어질 수 있는 일이기도 함을 이 곳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흉내냄이 아닌, 그 사람의 안에서 본래의 모습을 가진 채로 흘러나오게 됨을 보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요.. 나는 세상에서 그런 분들을, 그런 목사님들을 많이 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맑은 마음의 상태를 닮아가고 싶은 그런 분들을 많이 보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세상적인 능력에 그 우위를 절대로 두어서는 안되는 귀한 심성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양을 먹이도록 목자를 선택하시는 데에는 여러 가지 기준이 있으실 것이며, 또 각 목자마다 장점과 단점, 그 쓰임받는 목적과 양상도 다를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인간적으로 어떻게 판단하는 가와는 전혀 달리 주님의 생각이자 판단이신 것이지요.
그러나, 목자의 진실된 모습, 그리고 낮아짐과 온유함을 보고 듣고 배우게 하는 예배들이 지금의 내게는 참 귀하고 좋습니다. 내가 나 자신도 모르게 가지게 된 어떤 회의와 의심들을 치유하는 시간들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