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톨스토이의 책을 발견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 때였습니다. 교실에는 반 아이들이 자신의 집에 있는 책들을 몇 권씩 가져다가 놓고 서로 돌려가며 읽곤 하던 학급문고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청소가 끝나고 난 후, 선생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천천히 살펴보았던 학급문고, 즉 책들이 죽 꽂혀 있던 선반에서 그 책을 발견했습니다.
그 책은 문고에 꽂혀 있던 다른, 즉 어린이들을 위한 책들과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무런 그림이 없는 단색의 표지에 제목만 써 있는 것도 그랬을 뿐 아니라, 가로로 씌여지지 않고 세로로 글이 쓰여져 있다는 것도 달랐습니다.
그 시절, 호기심에서 읽기 시작한 그 책은 세로로 눈을 움직여야 하는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간결하고 깔끔한 문체로 쉽게, 그리고 다정하게 내 마음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책을 통해 위대한 문호인 톨스토이의 정신세계를 맛보았었습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할머니보다 더 현명한 손자들.... 그런 소제목으로 나열된 이야기들에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따뜻한 체온과 소박한 옷 뒤에 숨은 품위가 곳곳에 배여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들 중에서 한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이런 내용이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구두를 만드는 업을 하는, 신앙심이 두터운 한 직공은 평소 예수님을 뵙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겨울 날 저녁 식사 후 , 따뜻한 난로 앞에 앉아 스르르 잠이 들려던 차에 그는 자신의 앞에 선 예수님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예수님은 직공에게 그 다음날 그를 방문할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정신을 차린 직공이 보니, 앞에는 아무도 있지 않고, 난로에 장작들만 활활 타고 있었습니다. 꿈이었는 지, 생시였는 지도 잘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직공은 자신이 본 것과 들은 말을 믿었습니다.
다음 날, 직공은 아침부터 행복하고 가슴이 설레었습니다. 난로 위에 따뜻한 찻물을 올려두고, 또 먹을 거리를 준비해두고는 일을 하면서도 그의 눈은 내내 창밖으로 향했습니다. 그의 작업실은 지하에 위치했던 지라 창문을 통해서는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다리와 발이 보였을 뿐이지만, 그는 설레임으로 창을 지나치는 발만 보이면, 창으로 가까이 다가가 누구인지를 보려고 고개를 위로 들어 올려다 보곤 했습니다.
오후가 지나갈 무렵이 되었는 데도 방문을 약속하신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에 그는 한 소년이 창문앞에 서서 떨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외투도 입지 못한 채 벌벌 떨고 한참을 선 소년을 여러 번 바라보는 동안, 직공의 마음에는 동정심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밖으로 나와 소년을 데리고 들어와 따뜻한 차와 먹을 것을 대접했습니다. 또 한참 후, 이번에는 갓난아이를 등에 업은 가난한 한 여자가 창앞에 한참을 선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녀에게도 잠시 몸을 녹일 따뜻한 난로와 차, 그리고 먹을 것을 대접했습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또 한 노인을 대접했습니다.
저녁이 다 되고, 사람들이 발길이 다 끊어질 때까지도 직공은 예수님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어둑해진 밤, 그가 난로 앞에 다시 앉아 잠시 잠이 들려던 때에 그는 다시 자신의 앞에 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하루종일 예수님을 기다렸다고 말하는 직공에게 주님은 자신이 이미 직공을 방문하셨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의아해하는 직공의 앞에 선 주님은 소년의 모습으로, 또 아이를 등에 업은 여인의 모습으로, 또 노인의 모습으로 바뀌어갔습니다. 따뜻한 미소를 지은 채로 말이지요.
아마, 톨스토이는 성경에 있던 어느 구절, 즉 주님이 말씀하신, 누구든 내 이름으로 이 작은 소자 하나를 영접하면 그것이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라고 하신 구절을 생각하고 그 이야기를 썼던 것인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사람들을 사랑하실 뿐 아니라, 사람들도 그들 스스로 서로 간에 사랑으로 함께 나누기를 원하심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지도 모릅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또한 가르치며, 스스로 실천하고자 하는 삶을 살았던 톨스토이, 그는 한 사회학자의 말에 의하면 이성적으로 개종한 크리스찬이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믿음을 자신의 이성을 통해 진리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마음으로 저절로 깨닫거나 계시 등에 의한 신앙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고찰,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기독교의 진리가 진리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자신의 이성과 의지로 그 믿음의 길, 즉 크리스찬의 길을 택한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과의 내적인 관계, 성령님에 의한 증거들을 믿음의 큰 바탕으로만 여기는 사람들도 많음을 볼 때에, 그런 개인적인 체험이 없이도 그처럼 깊고 강한 믿음의 바탕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 대하여, 더욱 그 문호에 대한 존경감이 들기도 합니다.
그의 귀족적인 배경과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생활 속에서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가진 것을 포기한 채 누리고자 한 가난함 속에서의 풍요로움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이 어떤 시각에서는 비판을 받기도 함을 알지만, 나는 그의 소박함이 묻어나는 단순한 진리에 관한 글들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조건없는 사랑, 그런 사랑을 닮아가며 인간들끼리도 서로 나누며 살아가기를 꿈꾼다는 것 자체가 때로는 어떤 면에서 상당히 현실성이 없어 보이는 몽상가, 또는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간에 신뢰가 부족한 사회일수록 더욱 그렇겠지요. 또, 세상에는 선의를 이용하려는 이기적인 사람들도 없는 것이 아니기도 하구요. 그러나, 살만한 세상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바로 나 자신, 내 주변에서 부터 시작되어져야 한다는 마음가짐이 있을 때에야만 그 파동이 점점 주변을 향해 큰 원을 그려 갈만한, 미미하나 분명한 실천적인 구심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임을 믿어봅니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고 믿기에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