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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버터플라이


BY 플러스 2005-10-16

마을 근처의 커다란 홀에서 '마담 버터플라이'  공연이 있었습니다.   

오페라 페스티벌에 참여한  한국의 오페라단이  교민들을 위해 무료로 공연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한 교민이신 분으로부터 표를 받게 되어 어두컴컴해진 저녁길을 나섰습니다.

 

오페라를 즐겨 하는 편은 아니지만,  TV가 아닌  공연을 직접 보게 된 지라  작은 기대감을 가지고 자리를 잡았습니다.

현대적인 감각의 무대장치가 맘에 들었습니다.

성악가들이 이전의 공연에서 열과 성을 다했던지,  목이 상당히 피로한 상태였습니다.

특히 나비부인의 시녀인 스즈키역으로 나온 메조소프라노와 나비부인의 애인인 핀커톤의 역을 맡은 테너의 피로한 상태는 아주 심각했습니다.

더군다나  많은 노래를 ,  그것도 고음을 소화해내야 하는 테너의 상태는 너무나 심각해서  음정조차도 맞지 않게 노래를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연히  이중창을 할 때에도  아름다운 화음은  들려오지 않았습니다.

주재영사인 샤르플레스역의 바리톤이 그나마 제대로 된 음색을 내어 주었고,  초초상,  즉 나비부인역의  소프라노 역시 피곤한 상태의 목소리였으나  끝까지  열정적으로 임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극의 구성은 어땠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휘어잡을 만한 매력적인 집중요소가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이끌어 나가는 극에 긴장감이 결여된 채,  산만하다는 평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뿐 아니라,  꽤 긴 시간 오페라를 보면서,  푸치니의 나비부인 그 작품 자체에 들어있는 메시지가 무엇일까,  하는 데에 회의까지 생겼습니다.   지루하고 통속적이기 그지 없는 이야기를  흘려보내면서 ,  그 이야기가 어떤 이야기였다면  내가 기대한 어떤 '충족감',  '내적 충전'을   느끼며 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것은  '하나님'에 관한 주제,  또는 그 주제가 직접적으로 그렇지는 않더라도  '성'에 관한 철학,  또는 관념을  그 저변에 깔고 있었다면,  '내적충전'을 느끼며 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나의 내적요구가 달라졌음을 스스로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할 겁니다.

 

인간이 생물학적으로는 동물에 속하나  동물과 중요하게 다른 점들 중의 하나가  인간은 '가치를 추구할 줄 아는 존재'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인간이  문명이라고 부르는 태고적부터 가져온,  그러니까  어느 시대든  어느 나라든 어느 인종이든 문화권이든 할 것 없이,  이제까지  공통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성향이라는 것이지요.

 

그 가치를 무엇에 두느냐...  그것이  또한 인간을  어떤 인간이게 하느냐를 가르는 것일 겁니다.    불변의 가치로서  사람들은 여러가지를 듭니다.    빼놓을 수 없는 상위의 가치로서  사람들은 진, 선,  미... 를 들지요.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진,선,미  그 위의 가치로서  '성',  즉 '성스러움'을 듭니다.   사실상,  진리라는 가치를  그렇게  구분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왜냐면  그 가치들은 서로 통해져 있으며  분리되기 보다는 통합된 '무엇'처럼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 '성스러움'이 가지는 아름다움,  그 진실함,  그 광대무변한 진리의 세계,  그 지극히 선함,  그것에 어찌 취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나는 그 안에 점점 더 깊이 들어가길 원합니다.   그래서  더욱 원합니다.   그러니,  작은 오페라 공연 하나에서 느끼는 나의 생각과 느낌이 달라져 버릴 수 밖에 없게 된 거겠지요.

 

 

다시 오페라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오페라가 막을 내리고,  사람들의 박수소리에 답하러  성악가들이,   즉 배우들이 무대위에 하나씩 차례로 나왔습니다.

 

작은 배역을 맡았던 배우들이 먼저 나오고,     박수소리가  평범하게 울립니다.

우스꽝스러운 역을 한 결혼중매인이 역시 익살맞은 태도로 인사를 하고,   사람들의 박수소리도 갑자기 즐겁게 커집니다.

그리고  몇 명의 시녀와 스즈키가 나옵니다.   역시 평범합니다.

샤르플레스가  나옵니다.  박수소리가 다시 커졌습니다.

이제 주인공역인 사람들만이 남았습니다.

핀커톤이 나왔습니다.   박수소리가 그저 평범하거나 조금 덜 합니다.

샤르플레스역을 맡은 바리톤이 그런 핀커톤을 맡은 테너의 얼굴을 조금 염려스럽게 쳐다봅니다.

핀커톤을 맡은 배우가  실망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성심껏 인사를 합니다.

초초상과 그 아들이 나오고 박수소리는 절정에 달합니다.

그리고 모든 배우들이 손을 잡고 몇 번이고 고개를 조아려 인사합니다.

 

나는 핀커톤역을 맡았던 배우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샤르플레스 역을 맡았던 배우가 핀커톤을 바라본 그런 심정과 비슷한 것이었을까요.

그런데,  핀커톤역을 맡았던 배우는 더 열심히  끝까지 인사를 합니다.  정성스럽게...

 

나는 그 역을 맡았던 배우가 나와서 혼자 인사할 때에 나 또한 박수를 제대로 쳐 주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제대로 노래를 하지 못했고,  자기의 역을 제대로 해내지 못한 거야.'라는 마음이 들었었겠죠.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  '그 배우는 자신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했던 거야.   그러니,  더 큰  격려의 박수를 쳐 주어야지.'  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도 가능했을 거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배우의 마지막까지의 태도로 보았을  때에,  내가 후자의 생각을 가져야하는 것이 더 좋았을 거라는 것이지요.   그것은 곧바로 미안함과 연결되었습니다.

 

집에 돌아와 잠시 인터넷에서 사람들이 쓴 글들을 몇 개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상담을 원하는 글을 올린 데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댓글이라는 것을 달아 놓은 것이었지요.   그 다양한 각도에서 올려진 댓글들을 읽으면서,  내가 이전에는 스스로 죄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죄들이 몇 가지 떠오르더군요.    나 자신 선하게만 살아온 줄로 생각하고,  오히려  내게 다른 사람들이 악을 행했음을 기억할 때가  있곤 한데,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미안한 맘이 드는 사람들의 얼굴이 몇 씩이나 떠오릅니다.   그것은 어느 시각에 눈을 맞추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즉,  '성'  또는 '진리'의 영역과  세상의 혼탁한 비진리들 속의 영역,  그 어느 영역에 내 눈이 속해 있느냐에 따라 죄이냐 아니냐가 달라지는 문제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더 깊이 '성'의 영역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다.   내 죄가 점점 더 크게 보여  후에는 내눈에,  내 안으로 향하는  현미경을 달고 있는 것 같을지라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