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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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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아홉의 봄


BY 모퉁이 2008-06-20

2008-06-19 08:53    

평소에 변비기질이 좀 있었고

심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진단컨데 치질이 생겨있었다.

치질은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고 수년 전에 이미 생겨있었고

다만 증상이 심하게 나타나지 않아

그저 단순히 대한민국 사람 얼마가 이 질병을 갖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나도 그 범주에 드는 한 사람으로 매김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2006년이 저물어가던 즈음에

뒤가 묵직한 느낌이 들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막 김장철이라 김장을 했고, 피곤해서 그런가 싶어 좌욕을 했지만.

하루 이틀이면 사라질줄 알았던 증상이 며칠을 끌었다.

마음먹고 병원을 찾았다.

의사와 남편한테는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된다길래

애써 부끄러움을 가리고 몸을 동그랗게 말아

 이상하고 웃기는 자세로 의사선생님과 만났다.

치질은 수술을 해야 되는 것으로 결정이 났고

이참에 대장내시경을 해보기로 했다.

수술 전 날 속을 비우는 작업을 했고  2박 3일간의 입원 준비를 했다.

속을 비운 참에 내시경을 했다.

결과는 일주일 후로 잡혔고 그 날 산고보다 더 고통스럽다는 치질수술을 받았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 후의 고통을 알 것이다.

엉거주춤을 추며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고

내시경 결과는 악성은 아니지만 직장에 제법 큰

선종이 있음이 확인되었고, 마침 대학병원과 협력병원이었기에

대학병원에 소견서를 써주셨고, 담당선생님을 연결시켜 주었다.

치질수술이 회복되는대로 검사를 받고 수술 날짜를 받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여를 지내다 대학병원에서 상담을 받게 되었고

바로 입원 수술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입원예약이라는 것을 하고

두어달을 기다리는데 그 사이 응급환자가 들어오면

 늦추어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는 동안 치질수술 받은 자리도 회복이 되어가고

약속과 가까운 날짜가 오자 (작년 3월)입원하라는 연락이 왔다.

평생에 아파 병원에 입원하기는 두 번째가 되는 것이다.

 

첫날, 아무것도 하는 것도 없이 비싼 2인실에서 하룻밤 묵었다.

다음날 간단한 검사 몇 가지를 하고, 오후부터 금식에 들어갔고

저녁에는 멀건 물을 4리터나 마셔야 했다.

욕지기가 나올 정도로 밍밍한 물을 마시고 속을 비우고 관장을 하고

주사를 맞고 그렇게 수술 준비에 들어갔다.

담당선생님의 수술 결정 설명을 들었다.

개복을 할 것인가 내시경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하시더니

내시경을 선택하셨다. 여차하면 개복도 할 수 있다는 말도 했다.

밤 늦게 주치의로부터 수술에 대한 안내를 받고

 뭔가 껄쩍지근한 수술동의서에 서명을 하고

실감나지 않는 밤을 하루 더 보내고 다음 날

남자가 여자한테 사탕을 선물한다는 화이트데이 낮 12시에

나는 수술방에 들어갔다.

딸아이와 남편이 손을 꼭 잡아주며 격려와 위로를 해주었다.

티비에서 보던 수술방으로 침대에 누워 덜덜거리며 들어가자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들렸다.

수술동의서를 받던 인상좋은 주치의가 걱정말라며 손을 꼭 잡으며 웃어주었다.

입에 이상한 것을 물리며 숨을 들이쉬라는 소리를 들은 뒤의 사건을 나는 모른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데 대답이 나오지 않고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희미한 의식 속에서도 제일 먼저 배를 만져보았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배가 깨끗했다.

아...개복하지 않고 내시경 수술이 가능했나보다. 휴~

춥다는 소리를 했는지 "추우세요? " 하며 담요를 덮어주었고

한기가 가시고 목소리가 나오자 간호사가 보호자를 찾는 전화를 했다.

다시 침대 끄는 소리가 들리고 엘리베이터 앞에 나와 있던 남편과 딸을 만났다.

막 들어서는 큰언니의 모습이 들어왔다.

시간은 오후 2시 반이 막 지나고 있었다.

수술은 잘 되었다고 했다.

수술을 하고 나자 진짜로 환자가 되었다.

손목에는 주사바늘이 꽂혔고 길다란 쇠막대기에는 약봉지가 주렁주렁 달렸다.

소변이 나오지 않아 소변줄을 꽂아 많은 양의 소변을 뽑아냈다.

어지러움과 구토증상이 생겨 힘들어 하니 무통주사를 빼고나니 한결 나아졌다.

전신마취를 하고 나서는 호흡운동을 해야된다해서 장난감같은 공불기를 열심히 했다.

다음날부터 복도걷기운동을 했다.

 

입원한 외과병동 복도 끝에는 정신병동이 연결되어 있었다.

운동이라야 복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왔다갔다 하는 수준이라

걷다보면 정신병동 앞까지 가게 된다.

양쪽으로 나뉘어진 병동 한쪽은 문이 잠겨있고 다른 한쪽은 열려있었다.

닫혀 있는 쪽은 중증환자인지 면회가 자유롭지 못하고

열려 있는 한쪽에도 간호사 외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육신의 고통으로 수술을 받은 환자와 정신의 고통으로 치료를 받는 환자가

복도를 사이에 두고 그렇게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곤 했다.

과연 어느 아픔이 덜하고 더할까. 답이 없는 물음을 지어보기도 했다.

 

 이런저런 약을 바꿔가며 주사줄을 통해 넣어주어 금식을 했지만 배는 고프지 않았다.

수술전날부터 금식에 들어가 5일을 굶었고,퇴원  날짜는 정해지지 않았다.

2인실에 누웠자니 심심했다. 다인실을 신청했더니 남편이 말란다.

화장실에서 오래있다 보니 다른 환자에게 불편을 줄 것이란다.

옆병상에 또래의 여자가 있었는데 큰수술을 받았는지 가슴이 흉하게 되었다.

나보다 열흘은 먼저 입원을 했는데 퇴원을 못하고 있었다.

중증환자신청을 하라는 의사 말에 기운이 없는 것을 보니 큰병이었나보다.

그녀가 퇴원을 하자 병상이 하루 쉬어 2인실을 1인실로 사용했다.

복도를 걷다보니 많은 환자를 만났고,

그들의 아픔 정도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약봉지로 대충 가늠해보기도 했다.

언제나 퇴원명령이 내리려나..하는데 

입원 일주일 만에 "이 약이 마지막이에요"하는 간호사 언니의 목소리가 무척 고마웠다.

정말로 그 약이 내 손목으로 다 들어가자 주사바늘을 뽑았다.

그날 저녁 아주 홀가분한 마음으로 밤새 복도를 서성거리며 잠을 잊었다.

아침,점심을 미음으로 먹고 퇴원명령을 받고  절차대로 계산을 하고

7박8일간의 병원생활을 청산했다.

내 집이 참 편안하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키라는 작은 의미를 되새기게 되었다.

간이식을 받은 친구가 3개월에 한번씩 정기검진을 받으러 오는데

채혈을 해놓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어쩐지 불안해 하던 모습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긴 시간 채워주는 역할만 했을 뿐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이 얼마나 초조했을까를 헤아리지 못했던 것이다.

 

지난 5월에 진료를 받으러 갔었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언니뻘은 되어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왔냐고 물었다.

이래저래해서 오게 되었다고 했더니 내 손을 잡으며

"자네는 복받은 거여.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나는 8년 전에 암수술을 받았어."

그러면서  묵주를 꺼낸 손에 내 마음의 기도를 얹어 드렸다.

 

지금은 특별한 지침은 없고, 그저 예전같은 일상으로 지내고 있다.

소화제와 변비약을 며칠 먹은 것 외에는 약물치료도 없었고

변비가 생기지 않도록 섭생에 주의하며 정신을 건강하게 하려고 한다.

수술 후 세 번의 진료를 받았고,   그 중에 두번의 직장내시경 결과도 좋았고

이제 11월에 진료를 예약해 놓고 있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픔과 수술 그리고 회복을 하는 동안

그동안 자만했던 건강에 대한 경각심을 깨우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건강에 집착해서 이것저것 가리는 예민함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평소에 육류를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치질수술 후 회복기에

지나치게 채소 위주의 식습관을 갖다보니 그것이 오히려 단백질 부족으로

 회복을 더디게 할 수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생각보다 회복이 더딘 것 같아 문의를 했더니

용종수술에 대한 불안한 마음과 단백질 부족이 한 몫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일부러 고기를 피하고 채소류를 고집했는데

결국 음식은 골고루 섭취해야 된다는 것이다.

 

진료차 만나는 담당선생님과의 면담 시간은 채 5분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것저것 묻고 싶은데 선생님 성격인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을 하신다.

별 거 아니라는 듯, 어찌보면 질문이 질문같잖다는 투다.

그 모습이 싫을 법도 하지만 오히려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 한다.

그만큼 심각하지 않다는 쪽으로 해석하려 한다.

조금 더 일찍 발견했으면 좋았을 아쉬움과

더 늦지 않아 다행이었음이 교차되었지만

그래도,그래도 후자에 대한 고마움이 더 컸던

마흔아홉의 봄을 그렇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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