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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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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연 하나


BY 모퉁이 2006-06-05

올해로 성년을 맞은 작은 딸도 투표권이 생겨서

이번 선거에는 우리 집에서도 꽉 찬 네 표를 행사 하게 되었다.

투표 장소가 집에서 가까운 작은 아이가 다니던 중학교였다.

아침을 먹고 네 식구가 투표장으로 향했다.

 

작은 아이가 중학교 2학년 이고, 큰 아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전학을 온 관계로, 큰 아이는 투표장인 이 중학교는 처음이다.

작은 아이 말에 의하면 학교가 가까워서 집에서 뛰면 1분이면 된단다.

그러면서

"엄마는 우리 학교에 안 와 봤었지?

비가 와도 집 가깝다고 그냥 오라고 했지."한다.

내가 언제 그랬냐.

내가 한쪽 옆구리에 우산 하나 끼고 슬리퍼 삐그적 거리며

얼마나 뛰어 다녔는데..그리고 너 뻑하면 뭐 안 가져갔다고

갖다 달라고 해서 또 갔었지.한번은 교실 복도까지 갔더니

복도 한쪽 수도에서 어떤 남학생이 면도를 하고 있더라.

그거 보고 얼마나 놀랬는데..

나한테 준비물 갖다 달라 해놓고 너는 열심히 장난치고 있다가

나를 보고 입을 함지박 만하게 벌리고 웃으며 '엄마~'하고 불러서

니 앞에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잖냐.

하두 니가 급하다 해서 맨얼굴로 헐레벌떡 갔었는데

그때 니 엄마 안부끄럽더나.

또, 니 전학 할 때 가고 졸업할 때 가고 또....[한 번 더 갔었지.]

괄호 안의 말은 하려다 그만 두었다.

 

또 그 한 번은 아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을 사건이었다.

중학교 3학년 신학기때 매사 거들기 좋아하는 아이는

환경미화 준비를 한다며 자주 늦었다.

어떤 날은 교문을 닫을 때까지 준비하다가 우리집으로 아이들 여럿이 와서

준비작업을 하느라 온 집안을 늘어놓기도 했다.

아이들 한테 인기가 있었고, 학교생활에 별 무리가 없는 아이로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담임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학교에 한번 다녀가라는 것이었다.

공부는 아주 잘하지 못했지만 평소 붙임성 있고 명랑한 아이라

학교에 불려갈 일이 생겼으리라고 생각지도 못했고 짚히는 내용도 없었다.

하여,선생님 시간을 묻지도 않고 내 시간에 맞춰 가겠다고 했더니 그러라고 했다.

오전에 일을 보고 점심시간에 교무실로 갔다.

그때 담임을 처음 봤다. 젊은 여선생이었다.

인사를 하고 아이의 학교생활을 묻고 그냥 그랬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없이 메모지 하나를 내밀었다.

뭔가고 펼쳐보니 별 시답잖은 낙서 종이였다.

 

환경미화준비를 시켜놓고 선생님은 일찍 퇴근을 했단다.

준비물을 사라고 돈을 주었고 아이들은 남아서 환경미화준비를 했단다.

다음 날 준비물을 사고 남은 돈을 선생님께 내미는 중에

메모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는데 그것이었다.

이 낙서가 어쨌다는 것인지,펼쳐보니 아무렇게나 갈겨쓴 낙서 종이

이런저런 글들 속에 [미쳤군]이란 글이 들어 있었다.

아이가 고의적으로 선생님께 보인 낙서라는 것이었다.

내 아이여서가 아니라 그런 낙서로 선생님께 대들만큼 심장 강한 아이는 아니다.

뭔가 오해가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아이는 아니라고 한다지만 선생님은 아닌게 아니라고 믿는 눈치였다.

아이와 마주 앉지 않았었고 아이에게 들은 이야기가 없어서

나는 선생님 말만 들어야 했다.

주변 선생님들의 힐끗 거리는 눈빛이 거슬릴 정도로 싫었다.

그런 이야기 였다면 조용히 둘이 나눌수도 있었을텐데

교무실에서 그것도 옆자리 선생님이 있는 자리에서

내 아이의 흉을 듣게 하는 것 같아서 정말 싫었다.

[내가 알고 있던 내 딸이 아닌가,

정작 나만 아이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던 건 아닌가.]

별 생각이 다 들면서도 '아니다. 뭔가 잘못 알고 이러는 것일거다.'

도리질을 하면서, 내 아이를 타이르고 알아보겠으니

시작한 환경미화준비는 마무리 짓게 해달라고 했다.

지은 죄 없이 죄인마냥 인사 하고 교무실을 나왔다.

운동장이 참 넓었다.기분은 묘했다.현기증이 났다.

 

아이가 돌아와서 말했다.

선생님께 쓴 게 아니었고 선생님께 보일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아이들끼리 주고 받던 대화를 무심코 적었던 것이고

남은 돈을 드리는 중 주머니에서 딸려 나온 메모지를 보고

얼른 챙기려는데 선생님이 보자시더니 얼굴색이 변하면서

아이한테 바른대로 말하라고 했었단다.

같이 있었던 아이들도 선생님께 쓴 글 아니라고 했으나

이미 굳힌 심증을 달리 할 기미없이 아이의 고개를 떨구게 했던 것이었다.

선생님이 믿어주지 않아서 속상했고,그래서 울었고,

복도에 서서 엄마 돌아가는 모습 보고 '엄마~'하고 부르고 싶었지만

참으면서 또 울었다고 했다.

그 소리를 들으니 내 속이 울컥거려서 화장실로 급하게 들어갔었다.

아이를 믿어주기로 했다.그렇다고 선생님을 미워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스승의 날.

아이는 선생님께 편지와 꽃 한 송이를 보냈고,

그 후의 학교 생활이 오해를 풀게 했는지 더 이상의 불편한 관계는 보이지 않았다.

 

우등상은 못 받았지만 모범생으로 졸업을 하던 날

교실은 어수선할 정도로 시끄럽고 복잡했다.

한 사람 한 사람 졸업장을 나눠주고 마지막으로 선생님과의 작별 인사를 나누던 중

선생님의 한 마디가 짜르르 콧날을 쑤셨다.

"수진아~너 선생님 한번 안아주고 갈래?"

수진이는 내 딸이다.

커다란 아이가 조그만 체구의 선생님을 품에 폭 안고 둘이 한참 말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가 먼저 눈물을 머금었다.

순간 교실은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과 제자는 그렇게 울먹이며 지난 감정을 태워 버렸다.

 

지금 대학교 2학년이 되었고 유권자가 되어

그 시절 그 사연이 있는 그 학교에서 생의 첫 국민투표를 하고 왔다.

조그만 운동장을 걸어나오면서

그 날 이 좁은 운동장이 그렇게 휑하고 넓게 보였던 것은

그만큼 내 마음이 빈 탓이었을까.

아이 눈에 보인 운동장의 넓이도

5년전 그 운동장이 아닌지 머뭇거리는 목고개 뒤에

바짝 마른 작은 수돗간이 쓸쓸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2006-06-02 16: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