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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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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하루


BY 모퉁이 2006-04-17

해마다 4월 즈음이면 남편의 30년 지기들의 정기 모임이 있다.

진해,부산,포항,영주,대전,오산,평택,삼척,동해,서울

그야말로 팔도강산에 흩어져 사는 친구들이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전원 참석하는 의리 깊은 모임이다.

모임에 총무직을 맡은 남편은 무늬만 총무이지 그 역할은 거의

마누라인 내가 다 한다.

이번 모임은 동해 망상으로 정했다.

모임 시간이 저녁 무렵이라 오전을 비워놓기가 아까워서

대전 사는 이와 함께 오대산을 들렀다 가기로 합의를 봤다.

일박할 준비는 미리 해놨기에 차에 싣기만 하면 되었고

토요일 아침은 좀 일찍 일어나서 간단하게 도시락을 준비했다.

서울에서 아침 7시에 출발한 우리와 대전에서 7시에 출발했다는

사람과 문막 휴계소에서 몇 분 차이로 만날 수 있었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서 오대산 아래 상원사 입구에 도착했다.

국립공원 입장료와 문화재 관람료와 주차비를 합하니

2인에 10800원을 달라고 한다.

 

오대산은 처음 가는 산이다.

등산 메니아는 아니고 그저 운동삼아 서너시간 정도는

거뜬히 다닐 수 있는 체력은 유지하는 편이라

해발 1500미터 정도는 겁없이 다닐 수 있으리라 평가했는데

오랫만에 오른 산이기도 하거니와 산이 너무 단조롭고

경사가 겹쳐서 재미도 못 느끼고 숨만 가팠다.

침엽수의 푸른색 외에는 녹지 않은 눈얼음과 함께

겨울색에서 벗어나지 못한 그림이 약간 을쓰년스러웠다.

 

비로봉 정상에 서자 바람에 거세게 불어서 헝클어진 머리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저만치 모자가 날아간 아저씨도 있었다.

비로봉 돌문패 앞에서 가까스로 잡은 폼을 허망하게 한 것은

기껏 챙겨온 카메라가 건전지를 다 먹어 버려서 그만 횡사를 해버린 것이다.

이것도 내 탓인양 남자가 눈을 살짝 흘겼다.

이런,,아깝긴 하지만 별 게 다 내 탓이야..자긴 뭐했노.

 

한무리 남정네들이 같은 모자를 쓴 것으로 보아 직장에서

단체로 등산을 온 모양인데 먹거리가 엄청 푸짐했다.

색깔 고운 김치가 맛갈스러워 보였고 족발에다 김밥에다

노란 호박떡이 허기를 재촉했다.

두 집에서 꺼낸 도시락은 내가 새벽에 일어나서 싼 유부초밥과

대전 댁의 찰밥에 구운 김을 싸온 것이 전부인 우리와 비교 되었다.

'맛있는거 많이 싸왔네 그쟈?' 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내가 좋아하는 줄 어떻게나 알았는지 노란 호박떡을 한 접시

갖다 주는 마음 좋게 생긴 젊은 아저씨가 무척 잘 생겨 보였다.

고맙다는 말을 짧게 하고' 그러게 어딜 가나 줄을 잘 서야 하고

이웃을 잘 만나야 굶지 않은 것이여..'

어느새 넉살 좋은 아줌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예쁘게 썰어 담아 온 오이는 생각이 없고 따끈한 차로 몸을 녹이고

약속된 시간 내에 도착하기 위하여 서둘러 가방을 챙기면서

'정말 먹을 거 많이 챙겨왔네.무거워서 어케 지고 왔지?'

어마나..이 소리도 들었나,내 입모양을 살피는 이가 있었나.

'떡 좀 더 드릴까요?' 하는 소리에

'네...가방이 비었어요.'하는 이 주책 바가지.

'건강하시고 복 받으세요'인사를 남기며 마음씨 좋은 사람들을

뒤에 두고 올랐던 길을 다시 걸었다.

 

돌 계단이 많고 나무 계단 사이의 흙이 마모 되는 바람에

매우 불편한 계단길은 하산하기 어려움이 있었다.

거기다가 얼었던 눈이 녹기 시작한 터라 질퍽거림이 심해서

바지가랭이며 신발이 온통 흙투성이었다.

 

진달래는 겨울잠에서 깨어날 기미가 없고

간간히 양지쪽에 터 잘 잡은 제비꽃 몇 식구가

그나마 꽃피는 봄임을 알려주려 애쓰고 있었다.

하얀 입술을 쭉 내민 키작은 꽃의 이름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문화재 관람료를 지불했으니 상원사에 들러 여기저기 살폈어야 했는데

제대로 구경도 못했다. 상원사 자체가 문화재 인지 또 다른 문화재가

있는 건지 공부도 못하고 수박 겉핥기보다 더 간단한 답사를 하고 나왔다.

약 4시간이 소요된 산행이었다.

 

숙소에 돌아와 반가운 얼굴을 보고 준비한 음식으로 만찬을 하고

숙소 바로 앞에서 따각거리며 걸어오듯 밀려오는 파도 소리에 반해

밤바람과 정면 대응하며 잠깐 걸었다.

산이 평온을 준다고 하면 바다는 슬픔을 끌어내는 것 같다.

온갖 울분을 쏟아내기 좋은 대상 같기도 하다.

부여안고 같이 통곡하기 좋은 친구 처럼 보인다.

볼살에 꽂히는 바람이 차서 등산 옷의 뒷덜미에 달린 모자를 끌어 당겼다.

 

넉넉한 웃음과 해후를 하고 돌아오는 길은

물어물어 알아내었다는 냉면집 간판을 찾아 택한 국도였다.

참..저 남자에게 저런 면도 있었나?

하마터면 괜한 말이 터져 나올 뻔한 했다.

급할 것 없이 돌아오는 길이긴 하지만 역시나 산벚꽃 한 그루

눈에 띄지 않는 황량한 시골길은 간간히 못자리 준비를 하는

바지런한 농부님네 마당 구경으로 족해야 했다.

 

허름한 어느 시골집 마당에는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신발이

어림잡아 한 가마니는 될 듯하다.

잔뜩 기대를 하고 받은 물컵은 플라스틱 물컵이요,

냉면 그릇은 멋없는 스텐냉면기이다.

무말랭이 무침이 별미라는 것까지 새기고 온 남자는

냉면 킬러라 할 정도로 좋아하는 메뉴이기도 하지만

나는 그 정도는 아니어서 왠만한 냉면 맛은 그저 그렇다.

'내 입에는 별 맛이구만 이걸 먹으려고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이 구석을 찾아 왔단 말이지? 동네 사람들이 보면

우리를 보고 별종이라고 하겄네 정말..이걸 사먹으로

차타고 땀빼가며 찾아 온다고..'

또 이렇게 내뱉을 뻔 했다.에이그~이눔의 입이 복을 막아요 증말..

 

오는 길에, 맛있는거 먹을 때 내 생각 나더냐고 닭살스런 질문을 했다.

그렇다고 하는 남자 말을 믿기로 했다.

앞서가는 걸음 멈추어 기다려 주는 사람도 이 남자.

맛있는거 먹을 때 내 생각 해주는 사람도 이 남자.

밤바다 구경가자고 몰래 전화 해 주는 사람도 이 남자.

결국은 둘이 지고 갈 무게의 멍에임을

남자와 여자는 말하지 않아도 어느새 아는 사이가 되어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