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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


BY 모퉁이 2006-01-09

금융사에 다니는 위층 아우가 신년도 달력과 가계부를 주어서

지난 해 달력을 걷어내고 그 자리에 새 달력을 걸었다.

탁상용 달력은 식탁 위에 세워놓고 모임 날짜나 소소한

메모를 해 두면 적당하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지난 년도 가계부와 함께 새 가계부에는

작은 아이 라식수술비를 시작으로 올해는 첫장부터

큰돈 지출로 시작되었다.

 

새 달력을 걸어 놓은지 며칠이 지난 날

남편이 달력을 선물 받았다며 갖고 왔다.

포장이 묵직해서 나는 참치셑 인줄 알았다.

몇 만 원은 할 것이라는 달력이 포장 값에 다 들었을 것 같아

괜한 낭비가 아닌가 싶어 씁쓸했다.

타이밍 놓친 달력 선물을 받고 지난 해 달력을 거두니

 새 종이가 아까워 몇 장은 가위로 잘라 메모지로 재활용

하고도 남아 결국은 쓰레기통에 접어 넣으면서

예전같으면 이 달력 종이도 버림없이 잘 썼었던 생각이 났다.

그땐 달력도 선물 받던 시절이었다.

물자가 풍족치 못해 달력이 귀하기도 했지만 선물용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고 한다.

 

내가 기억하는 달력 중에는 한 장으로 된 달력이 있었다.

모 국회의원의 사진이 가운데 박혀 있는 달력을

방 한쪽 벽에 붙여놓고 일 년 열두 달을 세어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 국회의원은 내가 어른이 되고서 국회의장까지 지냈으니

내가 이름 석자 기억하는 정치인 중에 한 사람으로서 그의

긴 정치인생을 예감하는 홍보용이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 달력에는 내가 기다리는 날도 들어 있었더랬다.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이 다가오면 빨간색 크레용으로 동그라미

쳐놓던 습관은 지금도 가족들 생일과 기념일을

새 달력을 얻어오면 바로 그려 넣는다.

올해는 하루 더 기억해야 되는 날이 생겼는데 아버님 기일이

음력 일자로 하다보니 다음 해로 넘어가 동그라미를 치지 못했다.

 

금반지라도 하나 할라치면 동네 사람들과 계를 모아야 했던 엄마가

금은방에서 얻어온 달력은 습자지처럼 얇은 종이에'보석당'이라고

적힌 일력이라는 것이었다.아침에 일어나면 일력부터 떼내야

하는 수고로움이 필요한 것이었지만 이것은 달력으로서의 역할보다

다른 용도로 더 충실했지 싶다.

화장실용 종이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신문지나 헌책을 찢어 쓰던

우리는 그 얇은 일력 종이가 화장실 용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그래서 그 달력은 헌날 날짜가 미리 가 있어서 믿을 수 없는

달력으로 타락해 버렸다.

훗날 시댁에 갔더니 주방 벽에 일력이 걸려 있어서 새롭게

쳐다 봤더니 역시나 날짜와 맞지 않았다.

시댁에서는 그 일력이 생선가시발림용으로 애용된지 오래 되었다고 했다.

 

요즘처럼 초등학교 교과서가 무료 배포 되던 시절이 아니어서

헌책을 물려 받거나 새책을 사더라도 동생에게 물려줘야 된다는

세뇌를 받던 시절이라 새 학년이 될 무렵에는 교과서에 껍데기를 씌웠다.

신문지에 싸는 아이들도 있었고 누리끼리한 시멘트 봉투를 털어서 싸기도 했는데

그때 이 달력 종이는 최상급의 책거풀용이었다.

빳빳하고 깨끗한 종이로 책껍데기를 씌워서 국어 산수 사회 자연

이라고 책 이름을 적고 그 밑에 새 학년과 이름을 미리 적어 놓고는

새로운 다짐들을 하곤 했었다.

우리 아이들 초등학교 때만 해도 내가 책거풀을 입혀 주곤 했는데

요즘은 책을 보호하고 아끼는 차원이 아니라 멋으로 요상한 문양의

잡지책을 찢어 겉을 싸놓은 것을 봤다.

 

동네 공터에서 딱지놀이를 할때도 이 달력 딱지가 인기 있었고

요즘도 윷판을 그릴 땐 이 달력 종이만큼 만만한 것이 없다.

지난 달력 한 장 정도 남겨두면 올 설에도 아마 요긴하게 쓰일듯 하다.

 

거실 한쪽 모퉁이에 걸려있는 올해 달력은 지난 달과 이번 달 그리고

다음 달이 나와 있고 글자가 큼지막한  달력이다.

예쁜 그림이나 멋진 포즈의 배우는 볼 수 없지만 한 눈에

3개월 치를 볼 수 있어서 잠깐 게을러도 용서가 되고

부지런하게 미리 넘겨 놔도 이해가 되는 실속달력이다.

'올해도 저 달력에  채워진 365일 중에 단 몇 날이라도

훗날 기억 속에 남겨질 좋은 일로 메꾸어졌으면 좋겠다.'

하면서,쳐다 본 달력 날짜가 어느새 신년맞은지

아흐레 되는 날이라고 일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