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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씨에게 남학생 방을 쓰지 못한다고 한 학교의 방침이 차별행위라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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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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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BY 모퉁이 2006-01-02

예전에 살던 곳인지 그다지 낯설지는 않은 곳이었다.

우리가 이사를 했고 짐 정리를 하고 있었다.

장농 위에 내 물건이 아닌 서랍 몇 개가 올려져 있어 열어보니

구슬도 아니고 돌맹이도 아닌 단단한 것들이 가득했고

검정색 치마 저고리가 들어 있었다.

'이건 상복 아니야? 이런게 왜 여기 들어있지?'

혼자 중얼거리다 눈을 떴다.꿈이었다.

평소 꿈을 잘 꾸지도 않지만 앞뒤 연결이 되지 않는

야릇한 꿈 이야기를 하면 개꿈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그날의 꿈은 꿈속에서도 기분이 묘했고 깨고 나서도

찜찜하고 개운하지 못한 기분이 오래갔다.

 

열흘 뒤는 성탄절이었다.

아주버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아버님 운명 소식이었다.

순간 가슴이 멎는듯한 아릿함이 밀려왔다.

'이제 가면 언제 오누?'

지난 추석날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채비를 하는 우리들에게 하신

아버님의 마지막 음성이 실제로 마지막 인사가 되어 버린 셈이다.

못난 자식은 목메인 소리로 꺽꺽거렸다.

불효자가 따로 없다.

멀리 사는 자식은 불효자다.임종은 커녕 한달음에 가지도 못한다.

 

서울에서 부산 거리가 무척이나 멀고 힘들다.

고속도로가 밀리지도 않건만 달려도 달려도 5분이고 10분을 달렸을 뿐이다.

이렇게 먼 길이었던가.더디게 가는 시간이 야속하기만 했다.

삼형제 중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아들(남편)은 아버님 영전에 눈물을 떨구었다.

83년 생을 마감한 아버님의 일생이 희미한 눈가에 서성이었다.

삼남매를 낳은 조강지처와는  18년 함께 했고 재혼 하신 어머님과는

35년 동안 자식들을 살갑게 보듬지 못하신 새어머님과의 보이는 것과

그렇지 않은 갈등으로 인해 아버님 마음속은 까맣다 못해 바스라지셨을 것이다.

새어머님 스스로 옭아맨 배타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식들 가슴에

상처를 주고 아버님은 그 모든 것이 당신 탓이라 여기며 가슴에 돌덩이

하나 올려놓고 사신듯 삼형제를 바라보는 눈빛은 언제나 에린듯 보였다.

 

속옷 사이즈 105'를 입으시던 건장하던 체구가

언제부턴가 줄어들고 어깨가 앞으로 쏠린듯한 자세로 걸으셨다.

아주 정신을 놓고 몸져 눕지는 않으셨지만 해가 갈수록 예전같지 않으셨다.

흙 묻은 등산화가 쓸쓸하게 보였다. 실로 두어번은 기운 듯한

등산 배낭도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래된 손목시계만이 아버님의 마지막 생을 재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숨 거두시던 날에도 풀어 놓은 시계를 차셨다고 한다.

가는 목소리로 막내 아들 이름을 불렀다고 해서 눈이 뜨거웠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막내가 새어머니와 가장 심한 몸살을 겪었다더니

가시는 걸음에도 막내가 밟히시던 모양이다.

 

장례식을 마치고 아버님 유품 몇 가지를 챙겼다.

밤색 가죽끈의 시계는 아버님과 30년을 함께 한 애장품이라 했다.

간직했던 수첩이 나왔다.

평소 아버님 성격이 묻어 있는 수첩이었다.

노란 테이프로 덕지덕지 떼운 수첩에는 아버님의 신분증과 몇 가지 증서가

있었는데 운동선수로 활약했던 선수증이 여러개가 있었다.

접은 표시대로 찢어진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전의 증 같았다.

순서대로 꿰 맞춰 보니 배구선수 시절의 선수증이었다.

그것이 당신에겐 무척이나 자랑스럽고 대단한 자부심이었나 보다.

그리고 그 속에 또하나는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막내 아들의 다섯살 즈음의 작은 흑백 사진이었다.

집 앞에서 세발 자전거를 타고 노는 막내 아들 사진을 가슴에 품고 계셨던 것이다.

아주버님도 남편도 시동생도 기억에 없는 45여년 전의 사진을

그 애지중지 하시던 당신의 선수증과 함께 깊이 간직하고 계시다니

아들에 대한 애처로움이셨을까,당신의 삶에 깊은 회환이셨을까.

아버님 안 계시니 알 길이 없고 자식들은 가슴에 또하나의 오열을 삼켜야 했다.

 

그렇게 긴 고통없이,그렇게 많은 아픔없이

자식들에게 짐 주지 않고 다툼없게 하시고

아버님은 조용히 주무시듯 곱게 돌아가셨다.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꽃 피고 새 우는 따뜻한 봄날이었으면 좋았으련만...'

하던 남편의 웅얼거림을 못 들은 척 고개 돌려

차창 밖의 번지수도 모르는 과수원 감나무 밭에 시선을 꽂았다.

황량한 겨울 들판이 아버님의 시계바늘처럼 쓸쓸히 지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