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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


BY 모퉁이 2005-06-06

수박 한 통을 사다놓은지 몇일이 지났는지 모를 일이다.

아이도 어른도 저마다 뭐가 그리 바쁜지

네 식구 오붓이 앉아 수박 한조각 같이 나눌 시간이 여의치 못하다가

모처럼 이른 저녁을 함께한 날,시원한 수박을 쪼갤 수 있게 되었다.

노안이 오더니 치아도 고장이 났는지 너무 차가운 것은 이가 시려 싫어서

설겆이 하는 동안 수박을 미리 꺼내놓았다.그래도 여전히 수박이 차갑다.

 

아이가 발간 수박을 설겅설겅 대충 몇 입 베어물고는 밀어 내놓는다.

마음만 먹으면 사시사철 제철 과일마냥 찾아 먹을 수 있는 시절이니

감질나거나 서로 먹으려 대드는 모습은 없지만

그래도 수박살이 발갛게 붙어 있는 채 버려지는 수박껍데기를 보니 

옛날 생각이 났다.

 

우리는 수박 속은 물론이고 수박의 겉살, 하얀 부분까지 깨끗이 깍아 먹었다.

어떨 때는 오이살 같은 그 허연 수박 겉살을 채 썰어서 양념 조물조물 무쳐 먹거나

된장찌개 감으로도 사용했었다.

그러고도 수박은 주로 화채를 해먹었던 것 같다.

수박을 먹는 날에는 어김없이 얼음을 사러 가야 했고

 얼음 사러 가는 심부름은 항상 내 몫이었다.

얼음을 사고는 부리나케 달려와야 한다.

수박을 빨리 먹어야 되기도 하지만 늦을수록 얼음 크기가 줄어든다.

숟가락으로 겉살까지 박박 긁은 수박을 커다란 양푼에 쏟아놓고

바늘 끝이나 숟가락 자루로 콕콕 쳐서 아무렇게나 깨트린 얼음조각을 넣고

설탕도 아닌 그 유명한 신화당을 넣어 휘휘 저으면

더위가 저만큼 확 달아나는 기막힌 화채가 되는 것이다.

저마다 국대접을 하나씩 들고 있다가

국자를 쥔 엄마 손이 내 차례에 오기를 기다리면 살그랑 거리는

얼음소리는 기절할 듯이 좋았었다.

그 발간 살에 팥알처럼 떠있는 수박씨,그리고 하얀 얼음.

처음엔 숟가락으로 퍼먹고 마지막 국물까지 쪽쪽 빨아 들이고

 한쪽 볼태기에 붙은 수박씨를 떼내며 동생 국대접에 남은

마지막 얼음 한조각을 뺏어먹을 궁리를 해보지만

얼른 눈치챈 동생이 반쯤 돌아 앉으며 냉큼 손으로 얼음을 집어내어

입에 쏙 넣고는 얼얼해진 입을 다물지 못해 꺽꺽 대곤 했었다.

 

날이 캄캄해지면 볼록해진 배를 쓰다듬으며 북두칠성을 찾아 헤매고

매케한 모기불은 유난히 내 곁으로만 날아와 눈알이 맵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감기운 눈가풀은 어느새 꿈속으로 이끌곤 했었다.

어느때는 엄마 무릎이었고 어느때는 모기장 속에 가두어진채 잠이 들어 있었다.

 

수박 속은 물론이고 수박 겉살까지 핥아먹던 시절이 있었는데

오늘 버려지는 수박껍질에는 살이 많이 붙어 있다.

먹다 만 수박살에는 아련한 그리움도 함께 붙어 있다.

오래된 이야기도 매달려 있다.

야무지게 긁어낸 수박껍질을 가면처럼 덮어쓰고

괜시리 장난치고 싶어지는 날, 그 속에 나부끼는 희미한 추억을 더듬으며

하릴없이 수박 껍데기를 잘게 썰고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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