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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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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BY 모퉁이 2005-05-09

 

무슨 복이길래..

나는 시어머님이 두 분이시다.

남편 나이 열여섯에 부모님은 이혼이라는 것을 하셨고

큰어머님의 소개로 지금의 새어머니를 맞아야 했다.

 

결혼전 남편과 교재를 할 때도 몰랐다.

어느날 내게 할 말이 있다던 남자가 한참 뜸을 들인후 어렵게 꺼낸 말이

[난 엄마가 둘이야..]

순간 먹먹하기도 했지만 어머님이 두 분인 것이 결혼과 무슨 상관이 있으랴 싶었다.

 

그런데 새어머니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계모의 전형적인 성격이었다.

적어도 삼형제와 세며느리에게는 그랬다.

아버님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어머님의 무시무시한 성격이 어우러지지 못해서

 집안은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살얼음 판이었다.

오판이기를 바라지만 어머님은 계모,새엄마라는 자격지심이 강하신 것 같았다.

자식들이 한마디만 반문을 하면 친엄마가 아니어서 그렇다고 단정을 지으시는 것이었다.

삼형제가 나란히 앉은 모습도 보지 못하시고,세며느리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눠도

못마땅해 하셨다.어쩌다 아버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어도 무슨 할 말이 그리 많냐며

핀잔을 던지시어 괜히 황당해 하시던 아버님.

그럴때마다 아버님은 자신이 무능력해서 그렇다며

당신을 책망하시고 괴로워 하셨다.

어쩌다 자식들이 다녀간 날이면 두 분이서 싸우시는 날이었다.

아버님은 자식들한테 너무 냉정하게 대하는 어머님이 서운하시고

어머님은 아내보다 자식들만 생각한다며 화를 내시니 자연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식들은 어느 누구도 어머님을 새엄마라서 새엄마기 때문에

속을 썩이거나 힘들게 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삼형제가 심성이 참 착하고 여리다.

혹시 자식들 때문에 아버님이 불편하실까봐 어머님의 명령에 복종했다.

어머님의 말씀이 곧 법이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소홀하거나 거역했다간 그 화를 아버님이 받아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화가 나고 억울해도 참았다.

나 역시 그런 삶에 속해야 되는 일원이 되다보니 많이 힘들었다.

 

세 며느리를 봤지만 한결같이 냉정하셨다.

세 며느리 한결같이 당신 맘에 들지 않아 했고

흉도 많고 탈도 많고,심지어 친정식구까지 들먹일 때는 많이 섭섭하고 슬펐다.

당신 마음이 내키지 않으시면 명절에도 문전박대였고

가져간 용돈도 양이 차지 않으면 방문 밖으로 던지고

가져간 음료수 깡통도 마당으로 내던져진 날도 있었다.

 

매달 드리는 용돈이 좀 부족했다면

이 자식이 살기가 어려운지,무슨 일이 생겼는지가 걱정이 아니고

 순전히 저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그렇고

부모는 안중에 없기 때문이라 억측을 하신다.

매사를 그렇게 비뚤게 보시어 그게 그렇게 서운하기도 했지만 뭐라 말도 못하고

참 많이도 울고 많이도 참았다.

그런 세월이 흘러서  큰며느리 본지 25년 둘째 22년 막내 18년 세월이다.

큰며느리 아직도 어머님 말씀에 네네 하는데 평생 그럴것 같고

둘째며느리(나) 조금씩 대꾸한 것이 먹혔는지 예전만큼은 아니신데

막내 며느리는 아직도 어머님께 서운한지 말문을 트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막내 며느리 조차도 이젠 용서가 되니 대단한 발전이다.

나는 한번도 받은 적이 없지만 가까이 사는 며느리들 김장도 해주시고

손주 입학 졸업도 챙기시니 언감생심 이런 날이 오리라곤 그 누가 알았으리.

 

엊그제 어버이날 전날이 시어머니 생신이셨다.

형님이 음식준비를 해서 오신다 했기에 나는 몸만 가면 되는 호사를 누렸다.

마침 어버이 날을 겸해서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은

명절 쇠러 갈 때만큼 도로가 막혀서 도착시간이 늦어졌다.

집앞에 서 계시는 어머니.

늦으면 되려 걱정 하실까봐 집 가까이 오면 시간을 일러드리는데

도착시간 예정보다 한시간여 늦어지니 조바심에 대문 앞을 서성이신지

한 시간이 넘었다고 하신다.

훌쩍 커버린 아이들 가슴에 할머니가 파묻힌다.

언제 본 어머니의 웃는 얼굴인지..어머니 얼굴이 환하게 피었다.

 

아버님,나는 지금도 아버지라 부르는 시아버님.

친정아버지를 여의고 결혼을 했기에 나는 시아버님을 아버지라 부른다.

아버님은 딸이 없어 며느리라기 보다 딸로 생각코 싶다셨는데

어머님의 그 불같은 성격때문에 따뜻한 눈길도 마음대로 보내지 못하셨다.

부엌에서 서성이고 있는 나에게 [힘들쟈~?] 이 말씀이

내게 주실수 있는 사랑의 표현이셨다.

그 기골이 장대하시던 분이 몇해를 지금 병석에 계신다.

전화 목소리도 제대로 못 알아 들으시고

자식들을 봐도 그저 멍하니 웃음을 잃었고 표정을 잃으셨다.

버릇처럼 뱉는 소리는 [얼른 가야 될텐데..그래야 니들이 편할텐데...]

 

삼형제와 같이 술을 마셔 다음날 자식들은 곤드레 되어 누워 있어도

아버님은 일어나셔서 어느새 약수터의 생수를 지어 나르시던 아버님.

하얀 모시 바지 저고리 차려 입으시고

터미널까지 며느리 마중 나오시어 대합실이 훤하던 아버님.

흰구두,검정구두,갈색구두에 맞게 양말을 챙겨 신으실만큼 멋을 알고

양복 안주머니엔 오래된 빗을 넣어 다니시며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게 정갈하시던 아버님이 지금 저렇게 힘없이

당신의 의자에 앉아 촛점 잃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는 눈빛이

일곱살 아이마냥 순하기만 하시다.

 

자식들이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라도 있을까봐

다 당신의 부덕이라며 자신을 책망하시던 아버님.

자식 낳아준 아내와 평생을 살지 못하고

그토록 자식에게 모질게 하는 아내 때문에 마음 고생했을

자식들에게 면목없어 하시는 아버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뚤지 않고 곧게 자란 자식들이

고마워서 또 미안하다는 아버님.

오래 하지 못하고 돌아와야 되는 아들 손녀 며느리의 손을 잡으며

[고맙다.잘 살아라.더 할 말이 없다]하신다.

그 모습을 보신 어머니의 표정에도 안스러움이 스친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서 연민도 느낀다.

 

세월이 약이겠지요.

세월이 약이랍니다.

삶의 아픔에는 이렇다 할 약이 없다지만

세월이라는 약이 명약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느낀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나도 어버이가 되어 있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