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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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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네


BY 모퉁이 2005-04-23

마당이 무척 넓다고 생각했는데  마당이 아니고 과수원 터라고 했었다.

앞마당과 뒤마당에 감나무가 많았고,이름도 모르고 먹어본 그 열매는

'비파'라는 과실이었다는데 오래전 기억에서 사라진 열매이다.

대문대신 늙은 감나무 두 그루가 장승처럼 서 있는 마당에는

송아지만한 개가 컹컹 짖어대어서 나는 같이 간 외삼촌 옷자락을 꼭 잡고

외삼촌 그림자에 숨어서 살금살금 그 집 마당을 기웃거려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그리고 수어 년이 지난 후,감나무는 몇그루 없고 텅 빈 들녘같이 변해버린 과수원 터.

 부지런한 이웃들이  비어버린 과수원 터를 개간하여 밭을 일구었다.

아버지도 그곳에 좋아하시는 호박을 심고 고구마를 심어서 이삭줍기가 아닌

고구마 캐는 재미를 몇 해 가져 보기도 하였다.

 

과수원 집은 동네에서 부자집이었다고 했다.

아들만 넷이 있었고 할아버지는 무척 덩치가 크셨는데

항상 누워만 있는 모습만 보았다.

할머니는 키가 아주 조그마 하셨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시는지

그 큰 할아버지를 일으키고 뉘시고 밥을 떠먹이시는 수발을 드셨다.

할아버지 방문을 열면 아주 지독한 냄새가 나서 마루끝에 앉았어도

코를 막아야 될 정도였는데 할머니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으신다.

 

마당가에 우물은 깊어서 나는 무서웠지만

할머니는 몇번이고 텀벙거리는 두레박을 그 짧은 팔로 끌어 올려

두레박 채 목을 축이고 물동이에 쏟아 부어 부엌으로 들고 들어가신다.

커다란 무쇠솥이 걸린 부뚜막 한쪽 옆에는 애기 신발처럼 작은 할머니 고무신이

놓여 있었다.외출용 고무신인지 늘 그곳에 모셔놓은 양 세워져 있었다.

 

호박을 넣고 끓인 된장찌개는 어느 맛집의 된장찌개보다 구수했다.

도마도 없이 손바닥에 놓고 뚜벅뚜벅 두부 자르는 솜씨를 보고

손을 다치지 않을까 싶어 내 손이 자꾸 오그라  들었다.

두꺼운 무쇠솥 두껑은 들어서 열기 보다 밀어서 열면

허연 연기같은 김 속에 할머니의 작은 얼굴이 한번 숨었다가 나타난다.

보리 알갱이가 우굴우굴한 무쇠솥에 할머니의 뭉툭한 손이 몇번 휘휘 젓고 가면

투박한 주발에는 잘 퍼진 보리밥이 봉곳이 담겨져 있다.

호박 넣고 두부 넣고 끓인 된장찌개에 열무김치 넣고 비빈 보리밥은

한동안 넘기지 못해 애먹던 그 보리밥의 기억을 멈추게 했다.

 

들리는 소리에 중풍은 3,6,9 세월을 갉아 먹는다 했다.

그래 그런지 할아버지도 9년 동안 병석에 누워 계시다 돌아가셨다.

어른들은 그랬다.이제 할머니 고생 끝이라고...

그러나 고생 끝이라는 말은 할머니에겐 사치였나보다.

 

아들이 넷이었는데 그 중 큰 아들과 둘째 아들이 평균 키보다 좀 작은 체형이었다.

왜소증은 아닌 것 같았지만 보통 이하여서 군대도 못갔다고 했다.

큰 아들은 나이가 한참 어린 없는 집 처자를 신부로 맞았다.

신부네 집이 너무 가난하여 입이라도 덜자는 심사로 아마 부자집이 소문난

과수원 집으로 시집을 보낸 것 같은데 신랑 신부 나이 차가 심하게 나고

신랑보다 신부 인물이 훨 낫다 보니 신랑한테 의처증 증상이 있었다 한다.

우물에서 물을 퍼올리다 시동생과 이야기를 나눠도 의심하고,빨래터에 다녀와도

의심하고,아들을 하나 낳았어도 나아지지 않아 새댁이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가고 말았다.

할머니는 젖먹이 손주를 손에서 내릴줄 모르고 업고 안고 키웠다.

큰 아들,마누라가 집 나가자 이젠 타락의 세월을 보냈다.

술로 자신을 학대하고 지나가는 행인들과 시비붙어 싸우고

그러나 어느날 집 밖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자세한 사인은 내 나이 그때 너무 어려서 기억도 추리도 할 수 없었다.

 

둘째 아들은 성격이 참 내성적이었는데 골방에서 무언가 골똘히 연구를 한다고 했다.

발명왕을 꿈꾸며 쉬임없이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특허 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그러나 불행은 거기서 그친게 아니었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그만 양 시력을 잃게 되었다.

시신경이 끊어지는 사고를 당했다고 했는데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 역시 잘 모른다.

 

세째 아들은 그나마 그 집에서 똘똘하다고 했었다.

군대에 갔었어도 얼마 되지 않은 월급을 모았다며

휴가 오던 날 할머니 고무신과 버선을 사왔고

휴가 기간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여 귀대 할 때

할머니께 용돈 쥐어 드리고 갔다고 동네 소문 자자하게 칭찬 받았다.

그리곤 제대 후 취직을 하여 장가만 가면 되겠다고 했었다.

그런데,그 칭찬이 제대 후에 비참하게 바뀌었다.

큰 형님 돌아가시고 작은 형님 맹인이 되어 버리자

세째 아들은 자신의 어깨가 너무 무거웠는지 대지 않던 술을 마시고

비틀대며 다니고 다니던 직장도 무단으로 결석하고

그날도 술을 마시고 언덕 위에서 아래로 오줌을 누다가 그만 낙상을 하여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더니 그만 직장까지 때려치고 그야말로

백수로 근근하더라는 것이었다.

 

마지막 네째 아들은 인물은 그 집에서 제일 나았다.

커다란 눈이 여자눈처럼 선했는데 이도 성격이 우유부단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무작정 좋기만 한 성격이라

온 동네 친구 다 불러 들여 퍼주기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니

친구들한테야 인기 있지만 할머니는 아들 친구들 뒤치닥거리에

그 작은 허리 한번 편하게 펴고 쉴 틈이 없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뚜렷한 일자리를 잡지 못하자

남은 세 명의 아들이 모두 백수로 자리잡자 할머니의 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 넓은 과수원 땅 팔아 쟁여 둔 종자돈은 야금야금 쥐방울 쌀가마 갉아 먹듯 없어지고

한 때는 동네 갑부로 불리우던 집이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남루한 처지로 추락했다.

그래도 덩그마한 기와집은 동네 어느집 보다 좋아서

어디로 봐도 동네 제일 부자집으로 비춰졌다.

 

여기까지는 내가 그 동네에 살면서 훔쳐보고 어른들 소곤거림을 엿들은 일부이다.

정확하지는 못할지라도 거의 근접된 사실이라 생각되어진다.

가난하던 시절,그 지긋지긋하고 구질한 동네의 기억이라고

내 친구는 그 동네에 살던 그 시절을 잊고 싶다고 했다.

한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 동네에 살던 기억을 몇번 끄집어 낸 적이 있다.

몇해전에는 일부러 그 동네를 찾아 가보기도 했다.

다른 동네는 다 개발되고 발전되었는데 유독 그 동네만은 컴컴하고 우울한 분위기 그대로,

아니 그때보다 더 암울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길다란 철길은 어디쯤엔가 내게 행복의 종착역이 있으리란 희망을 주었고

얕으막한 뒤동산은 사춘기 시절 방황을 달래주었던 곳이기에

굴뚝 연기만 봐도 배가 부를만큼 배고픔과 고단함은 있었지만

가끔은 내 안의 기억이 꿈뜰거릴때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장면 중에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