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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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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BY 모퉁이 2005-04-11

얼마전 친정에 가 있던 이튿날.
밤 9시가 막 넘어가는 시간에
메세지 음이 또로록 들렸다.

벌써 결혼 25주년을 맞는 친구다.
이른 결혼에 참 아쉬움이 많았었는데 
장남인 남편 15살, 막내 시누이 5살에 혼자 되신
억측같은 시엄니를 모시고 시작한 시집살이.
그때가 양력 2월이었으니 춥기도 했다.

이 친구네는 쌀가게를 했다.
아버지는 직장에 다니셨고  엄마는 쌀장사를 했는데
사실,이 친구 엄마는 새엄마였었다.

콩쥐팥쥐를 읽고 자란 터라
우린 새엄마에 대한 인식이 매서웠는데
그 엄마 역시 이 친구에겐 혹독했다.

학교에 오면 늘상 졸았고
한 겨울에도 코트가 없어 교복만 입고 다녔다.

돈이 없는 집도 아니었는데 친구는 항상 추웠다.

너무 힘이 들어서 몇일 가출(?)을 하여

친구 집에서 머물면서 그때 과외선생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친구 어깨너머 과외를 몇일 한 결과 10등이 올랐더라고 회상을 했다.


어쩌다 그 친구가 우리를 부르는 날은
하교 후에 공동 수도에서 물을 받아 둬야 했는데
우리가 그걸 거들고 대신 뜨신 찰밥을 얻어 먹었다.

선을 보고 세 번째 만남을 갖던 날.
남자를 소개시켜주겠다 하여 나갔다.
자그마한 키에 야무지게는 생겼는데
성격이 좀 깐깐해 보여서 걱정이었다.
그리고 한 달만인가
결혼을 했다.

집이란 울타리에서 탈출하고 싶은 것이

결혼을 하게 된 첫번째 이유였으니 힘들긴 힘들었나 보다.
그게 벌써 25 년 전 일이다.

9시가 넘었지만 전화를 했다.
시엄니 눈치가 보여 망설이는가 싶더니
다시 전화가 왔다.

늦은 밤에,바람이 무척이나 불던 날
택시를 타고 나타난 친구는
슬리퍼에 길다란 치마에 마음대로 두른
숄이 전부였다. 서두른 모습이 역력했다.

[춥겠다. 아무데나 들어가자. ]
따뜻한 국물 생각나면 가끔 들르는
체인점 오뎅집이 보여 망설이지 않고 들어갔다.

친구가 먼저 결혼한 후
나는 직장생활을 몇 해 더 하다 결혼을 했고
잠시 고향에서 같이 살긴 했지만
이내 나는 고향을 떠났고 그 친구 소식을 잠깐 묻고 살았었다.

그러다 수소문으로 그 친구가 포항에 산다는 것을 알아냈고
몇 해 전에 포항 간 길에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만남이라곤 뜬금없이 던지는 전화나
메세지같은게 전부지만,기억 속에서 지울수는 없는 친구다.

그러다 다시 남편따라 고향으로 내려간지 3 년째.
출장중이던 남편이 마침 오는 날이라
시엄니께는 남편 마중을 핑계대고 나를 만나러 나왔다고 했다.

둘이 뜨건 국물을 마시고 있는데
친구의 남편으로 부터 전화가 왔다.
거의 도착했으니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오겠다고 했다.

세 사람이 마주보고 나란히 앉아본지도 25 년이 되었다.
친구의 남편은 생각했던 것 보다 성격이 꽤 좋았다.
친구가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도와주었고
내성적이던 친구의 성격이 변하게 된 것도 남편의 도움이 크다했다.

그날 늦게 나올 수 있었던 것도 남편의 코치로 이루어진 일이기도 하다.

지금은 풍물을 배워 양로원같은 노인단체에 봉사활동도 하고

일년에 두어번은 훌훌 털고 여행길에 오르며 불혹을 슬기롭게 넘기고 있었다.

 

탈출구로 이용했던 결혼이라 했지만

결코 실망을 주거나 후회하는 생활이 아니었고

서로 보듬고 쓰다듬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사는 모습이

연출된 연기가 아닌 자연스런 행동임을

두 사람이 마주보는 눈빛에서 읽을 수 있었다.


25년 전,그땐 나도 청초(?)한 숙녀였지만
그 남자 역시 상큼한 청년이었는데
이번에 보니 이마에는 굵은 주름이 나이를 가늠해주고 있었다.
나 역시 후질근한 아줌마 대열에서 허덕대며 살고 있듯이..

질끈 동여맨 머리끝을 만지면서
친구는 목쉰 소리로 내뱉는다.
"건강해라.그래야 우리 또 만나지..."

하루를 완전히 채워가는 시간이 되어서야
마지막 손님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 바람이 쌩하니 불었지만
맥주 한 잔의 취기와 따스한 친구의 손끝이
까짓것 바람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

둘이 나란히 서서 손 흔들어 보이는 모습이
무척 정다워 보여 내 가슴이 훈훈했다.
"그래..건강하게 지내다가 어느날 갑자기 또 만나자마.."

2005-01-05 14: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