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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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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속의 아낙네


BY 모퉁이 2005-04-11

육십 평생 시부모 모시고 자식 키우느라

내 시간이라고는 가져 볼 엄두도 내지 못하다가

장성한 자식 출가시키고나면 나아지려나 했더니

이젠 손주들 치닥거리 하느라고 몸이 지레 늙을 판이라.

기운 있을 때 벌겠다는 며느리 말릴수가 없어 손주들 끼고 챙기고

어어 하다 보니 손주녀석 어느새 학교에 입학을 하였다네.

그리하여 벼르고 벼르던 일을 하나 저질렀는데 그것이 나이 들어

고상(?)해 뵈기도 하고  그동안 하고 싶었던 붓글씨를 배우게 되었다는

서예교실의 왕언니 정여사 님.

나는 그분이 존경스럽다.

예순 다섯의 나이에 비록 글씨를 잘 쓰지는 못하시지만

그 열정만큼은 어느 젊은이 못지 않으시다.

출석시간도 제일 빨라서 항상 교실문 열고 커피포트 꽂아 놓고

선생님 자리까지 가지런히 봐 놓고 붓을 적시고 계신다.

삼년 째 천자문으로 씨름을 하고 계시지만

내 평생에 열폭짜리 병풍을 만들겠다는 의지가 강하신 분이다.

 

엊그제는 그 분과 함께 바깥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어느 건물 경비일을 하시는 영감님이 하루 걸러 하루쉬는 틈을 타서

손주녀석을 모두 떠 맡기고 훌쩍 떠나게 된 것이다.

운전대를 잡은 서예교실의 총무와 세명의 마흔 줄 아우들과 동승하고

하루를 본인에게 할애하고 싶다고 하셨다.

 

집 나오면 갈 곳 정하지 못하는 것은 가출이나 외출이나 마찬가지였다.

운전대 잡은 사람에게 방향키를 맡기고 눈은 차창 밖 쓸쓸함에 머물렀다.

좀 더 일찍 나왔더라면 단풍이 멋있었을텐데..아쉬움이 있었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는데 도착한 곳은 이천 도예전시장이었다.

도예전도 끝나고 들판의 황금축제도 끝나 인적도 드물고 황량함 그 자체다.

도예의 고장답게 이천은 곳곳이 도자기가 널려있었다.

제일 편하게 눈에 띄는 것은 역시 장독항아리나 뚝배기등 생활자기들이고

열쇠로 채워진 장식장에는 숫자 읽기도 버벙한 그릇들이 있었지만

좋아보이기는 하나 어떠해서 좋은 물건인지

내 눈높이로는 가격매김을 가늠할 재간이 없다.

겉옷자락에 혹시라도 물건들이 스쳐 사고칠까봐 조심스럽게 구경만 하다

어느 칼국수 집 식탁위에 김치 항아리가 앙증맞았던 기억이 있어서

그만한 항아리 세개짜리 한셋트를 기념으로 샀다.

 

이천하면 또 쌀이 유명타하여  그 좋다는 이천쌀로 지은 밥을

동네보다 배는 비싼 돈으로  점심 해결을 하는데

정여사 님은 집에서 먹는 쌀이나 별 다른걸 모르겠다며

밥값이 비싸다며 몸에 벤 습관은 어디 버릴 수가 없다.

숭늉까지 훌훌 다 마시고 일어나다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 했다.

배가 너무 불러서...역시 아줌마다. 사 먹는 밥은 남기면 아깝다.

 

돌아오는 길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기념일 이야기가 나왔다.

여태 살면서 남편에게 받아본 선물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꽃 한 송이 받아보는게 소원이었는데 그것도 이제는 시들어졌다고 한다.

워낙이 그렇게 살다보니 서운한지도 모르겠고 그냥 그러려니 한다고 했다.

익숙해지면 편하더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집도 기념일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어서 같이 웃었다.

 

총무님 남편은 그게 아닌가 보다.

꽃다발을 못 받아봤다는 정여사 님께 세상에나 그럴수가 있냐고 한다.

그런데 우리의 정여사 님 말씀이

옛날에,나도 젊었을 때에는 이뿐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은 젊음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이뿌더라.

그런데 또 이상한 것은 이제 꽃다발을 준다해도 내가 싫다.

싱싱할 땐 향기도 좋고 이쁜데 이틀 지나 시들면

저걸 쓰레기통에 버리자니 부피 커서 쓰레기 봉투에 쑤셔 넣기도 힘들고

억지로 넣자니 봉투 구멍만 생기고,무엇보다도 시든 꽃을 보면

꼭 내 꼬라지(정여사 님의 표현)같아서 쳐다보기가 싫어지더라고 했다.

 

[후훗~

저도 꽃다발 받으면 먼저 생각나는게 돈이던데요.

하루 지나면 시들거 차라리 화분을 사던지

아님 먹을 걸 사던지,아니지 돈으로 주지..싶던데요.]

 

[맞어맞어..옛날에는 꽃이 좋더만

요즘은 정말 돈이 좋더라.]

 

예순다섯 되신 정여사 님이나 마흔 중반의 아낙이나

현실에 묶여 사는 모양새가 닮아서 좁은 차 속에서 날린 웃음이

 헛헛한 기침소리처럼 허공에서 짖고 있었다.

 

 

 

2004-12-10 1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