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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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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향한 34살의 날개짓


BY 김정인 2005-01-17

남자들이 일을 하면 흔히 '생계를 위한 거룩한 몸부림'이라 말하고, 여자가 일을 하면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사치스러운 자아실현'쯤으로 여기기가 일쑤다. 나에게 있어 지난 3년은 무엇이었을까? 뭐에 미친듯 홀리듯 직장을 다녔고, 나는 감히 그것을 '꿈을 향한 34살의 날개짓'이었다고 외치고 싶다.

3년동안의 나에게 맞지 않은 직장생활은 고통만 안겨주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식당일이다 버스청소다 안 해 본 일 없을 정도로 고생하시며 대학을 시켜주신 엄마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동안 벌은 돈을 몽땅 떨어 대학원에서 상담공부를 시작했다.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남을 도우고 싶다'고 하나님께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하면서도 즐겁고 남을 도울 수 있는 일을 해야 겠다는 일념하에 갓 결혼한 남편과는 주말부부를 선포하고, 울어대는 아이는 등에 칭칭감고 논문을 썼다. 무슨 공부를 또 하느냐고 친정과 시댁의 시선이 곱지 않았지만,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를 탄 것처럼 냅다 달렸다.

이렇게 어렵게 공부를 마친터라 학교선배가 '돈을 조금 받고 자원봉사하는 정도이고, 거의 1시간정도 기차를 타고 다녀야 하는 곳인데 일을 해 보겠느냐'고 물어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오케이라고 대답했다. 이 앞뒤 재지 않은 무식한 대답이 15개월 된 아이를 둔 34살의 주부가 한 대답치고는 너무도 무모한 결정이었다는 것을 그 이후 3년을 두고 나는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이게 왠 떡이냐'하며 덥석 물긴 했지만, 나의 첫 직장생활이 얼마나 파라만장 했을지는 대한민국의 엄마요 아내인 사람들은 누구나 불을 보듯 뻔하게 상상이 될 것이다.

우리 집은 장유, 아이를 맡길 친정 엄마의 집은 마산, 직장은 경산 모두다 출퇴근하기에는 만만치 않은 거리였다. 장유에서 마산까지 시외버스로 30분, 마산에서 경산까지 기차로 1시간 30분. 남편의 차는 주말 오후면 마산과 장유를 경유하는 이삿집 센터차로 변해 버렸고 아빠와 헤어지지 않으려는 아이의 울음으로 골목안이 떠들썩했다. 내가 일을 시작하면서 가장 미안한 사람은 아무래도 남편이었다. 내가 공부할 동안도 주말부부를 했었는데, 큰 아이를 낳고 기르는 15개월을 집에 있다가 다시 주말부부를 시작했으니, 밤이면 혼자 불꺼진 방에 들어갈 남편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 한곁이 무거웠다. 하늘을 치솟는 자아실현의 욕구는 마침내 남편, 아이, 직장과의 거리도 떨쳐 버린 채 나로 하여금 꿈을 향해 하늘 높이 하늘 높이 날아가게 했다.
주중의 나의 일과는 대충 이랬다. 새벽 5시 30분이면 엄마가 해 놓은 밥을 후루룩 국에 말아먹고 아이와 엄마가 깰까봐 까치발로 허겁지겁 나와 새벽 첫 버스에 몸을 실었다. 여름이면 그래도 새벽바람이 시원해 좋은데, 겨울이면 몰아치는 매서운 바람과 추위가 뼈 속까지 파고 들어와 마음 저편에 숨어있는 서글픔을 건드렸다. 새벽에 도시 간을 다니는 통일호 완행 통근 기차는 6시 30분이면 출발한다. 거의 1시간 반동안을 한쪽 의자에 웅크리고 겉옷을 이불삼아 자고나면 온 몸이 찌뿌둥하고 아프다. 어떨 땐 그것도 잠이라고 침을 흘리며 자다가 한 구간을 더 가서 낭패를 당한 적도 있었다.
이런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나를 보고 모두 대단하다라고 했다. 특히, 남자들의 경우 열명중 아홉명은 남편이 대단하며 남편에게 잘하라며 은근히 가족에 대한 이기적인 나의 처사를 비난하곤 했다. 그 당시에 처음 만나면 의례히 묻는 '집이 어디예요?'라는 말이 제일 싫었다.
직장이 마치면 황급히 저녁 기차를 타고 또 마산을 향해 갔고, 아무리 일찍 도착해도 엄마집까지 도착하면 9시였다. 하루종일 그리워 하던 엄마를 만난 아이는 엄마가 씻을 사이도 없이 업어달라 놀아달라 매달렸고 어떨때는 그 늦은 시간에 같이 놀이터에 간 적도 있었다. 아이가 아픈 날은 다른 엄마보다직장이 멀어 빨리 달려갈 수 없는 것때문에 몇 배나 더 심한 죄책감에 몸서리쳐야 했다. 연세 많으신 엄마도 이제 걸음마를 배워 천지도 모르고 뛰어다니는 15개월된 남자 아이를 돌보기엔 힘이 부쳐서인지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도 죄송할 따름이었다. 기차밖에 자욱히 어둠이 내릴 때면 항상 '내가 왜 이러고 사나?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이러고 사나?' 자문자답을 수십번도 더 했고, 계절이 두번 바뀌었을 쯤에는 남편과 엄마 아이 모두다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파김치가 되어 쓰러질 정도로 힘들어도 새벽 5시 30분이면 오뚝이처럼 발딱 일어나게 했던 힘은 무엇이었을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내 마음을 따근하게 데워주는 이들이 있다.
병원으로 입원하는 택시 안에서의 아저씨의 괭한 얼굴은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가기 싫어하던 병원이었는데, 아저씨는 가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마음의 상처에 술이라는 고약을 발라도 안 되겠던 모양이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고 정신을 잃고 여러번 쓰러지신 다음에야 마음을 고쳐 먹으신게다. 우울해 질때면 상담실을 찾아와 막내 동생뻘 되는 나를 믿고 따르던 아저씨, 방황하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해 항상 죄스러워 무덤 앞에서 어깨를 들썩이던 아저씨, 물리치료 받으시고 오시는 길에 임신한 나를 위해 주머니 탈탈 털어 검은 비니루 가득 예쁘고 비싼 사과을 내밀던 아저씨.
무단결석을 많이 해 선생님이 무서워 가출을 한 아이.느닷없이 자퇴를 한다고 선전포고를 하고 상담실을 뛰쳐 나간 날엔 물 한방울 제대로 넘길 수 없었다. 3살 때 엄마가 나가시고 병든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아이치고는 유난히 귀엽고 맑던 그 아이의 졸업식에 배가 산만해서 숨을 헐떡거리며 갔을 때는 얼마나 감개가 무량하던지. 얼마 전에 고등학교 입학 축하 전화를 했더니 선생님들이 자기보고 너무 공부잘한다고 서울대 가라 한다고 자랑이 한창이다. 아무래도 공고보다는 농고 간 게 잘 한 일인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왕따 문제때문에 엄마 손에 이끌려 왔던 아이가 어느 새 5학년이 되어 비오는 스승의 날 어젓한 총각이 되어 인사하러 왔던 일등 가슴 뿌듯한 기억들이 많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은 세상의 한귀퉁이에 서 있는 그들에게 나는 상담자요 누나요 친구였다. 그들 또한 고단하고 지친 나를 금새 불끈불끈 힘 솟게 하는 비타민 같은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어느새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고, 서로에게 다가가 꽃이 되어주고 있었다. 슬픔도 고통도 함께 나누면 반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곱절의 기쁨으로 변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나는 직장을 다닌 게 아니라 나에게 귀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던 것이다. 유달리 사람 욕심이 많은 나에게 그것은 모든 어려움을 무릅쓰고도 남는 충분한 이유였던 것이다.
남편의 야밥의 은밀한 음모에 휘말려 둘째 아이를 가지게 되었고, 직장을 그만둔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간다. 빚잔치 뿐인 가계부를 보며 한숨을 쉬다가도, 마구 울어대는 아이의 기저귀를 갈다가도 그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나온다. 몸은 비록 떨어져 있어도 나는 이 먼 곳에서 그들의 안녕을 빌며 마음을 나눈다. 퍼 내어도 퍼 내어도 자꾸만 솟아나는 옹달샘처럼 그들과 함께 했던 나의 짧았던 꿈의 우물에서 매일매일 행복을 길어 내 마음을 씻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