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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


BY 蓮堂 2007-06-25

 



결코, 절대로 받을 수 없는 전화인줄 알면서도 버튼을 눌러댔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니...............’ 규칙적이고도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안내가 혹시라도 번복될지 모른다는 엉뚱한 기대를 하면서 한참동안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이 시간이면 지구 반대편에서 짐을 풀고 있을 동서에게 못 다한 말을 하고 싶어서 이미 죽어버린 전화번호를 계속 눌러대고 있는 내가 바보 같아 자꾸만 눈물이 났다. 3년이란 시간은 나이가 들어가는 나에겐 너무나 길고도 지루한 시간이다.

떠나던 날 동서는 차 안에서, 난 차 밖에서 주위의 시선 아랑곳 않고 눈물을 훔쳐댔다. 지구가 텅 비어버린 느낌, 미국으로 동서를 빼앗겨 버린 아까움에 자꾸만 분한 마음이 들었다. 하나밖에 없는 동서에 대한 사랑은 어이없는 분노와 배신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바늘구멍 같은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미국 본사 입성에 성공한 시동생의 능력을 치하하고 축하하면서도 등 뒤에다가는 ‘분노’와 ‘배신’ 이란 말로 서운함을 드러낸 내 의중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시동생 내외이기에 미안해서 쩔쩔매기만 했다. 축하의 표현 치고는 너무 날을 세운 것 같다.

나를 지탱해 주고 있는 버팀목 한 쪽이 빠져 나간 자리가 너무 크다. 그들이 나를 슬프게 하고 있다. 목줄이 뜨끔거리고, 목줄이 죄어 오듯이 뻐근한 아픔은 이별이 던지고 간 흔적이다. 그 흔적이 바래 져 증발하기까지 견뎌야 할 시간은 길다.

두어 달 전 이승과 하직한 엄마의 흔적은 아직도 끈적임이 묻어 있어 긴 꼬리를 드리운 채 나를 따라 다니고 있다. 목젖이 보이도록 웃은 일도, 유쾌한 음악에 맞춰 두 다리 까닥거린 것도, 빨간 블라우스 걸치고 거리를 활보 한 것도 어쩌면 꼬리를 잘라내기 위한 나만의 몸부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죄스러움과 그리움이 범벅이 되어 한층 더 나를 괴롭힐 것 같아서이다. 웃고 즐기는 그 순간은, 빨간 블라우스가가 하늘거리는 그 시간만큼은 잊을 수 있고 견딜 수 있는 도피처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가슴이 터지는 듯한 슬픔의 깊이를 재지 못하고 슬픔의 언저리만 겉돌며 산 삶이 울어야 하고 아파해야 할 일 보다는 많았던 것은 그나마 나를 안도케 하는 다행스러움이었다.

엄마의 죽음 앞에서 난 진정한 슬픔이 무언지를 알아야 했다. 그래서 가슴이 터질 듯이 아프고 숨이 막혀서 제대로 울질 못했다. 쉰이 넘은 나이에 마주한 부모님의 유고는 나에게 슬픔이 무언지 아픔이 무언지를 제대로 일러 주셨다.

보기보단 여리고 눈물이 많다는 나에 대한 평가는 단순히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몸짓이 아니었음을 나보다는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었음이다.

예전의 어느 대통령이 사석에서 휘하에 거느린 사람들에게 그랬단다.

‘눈물이 많은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라’고. 눈물 많은 사람은 여리고 약해서 배신을 쉽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을 넌지시 비춘 일침이었다. 눈물이 없어도 배신은 할 수 있고 눈물이 많아도 배신을 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억지스럽게 싸잡아서 도매금으로 넘긴 것이 적이 맘에 안 들었다. 슬픈 일에는 울 수 있고 기쁜 일에는 웃을 수 있는 인간의 오감을 무시한 발언이다.

아침부터 슬픈 생각이 드는 날은 하루 종일 머리가 무겁고 가슴이 답답해 온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는 일들도 아침 기분에 휩싸이면 케케묵어 너덜거리는 기억들을 용케도 끄집어낸다. 부풀리고 앞지른 감정들은 서운함과 헛헛함 그리고 심장을 갉아대는 손톱이 되어 하루를 지옥처럼 보낼 때가 더러 있다.

기쁜 일 보다는 슬픔 덩어리가 더 명치끝을 눌러대는 요즘 딸을 출가 시킨 친정아버지는 사돈댁에서 천장을 쳐다본다는 옛말을 상기 시키며 자꾸만 천장을 쳐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눈물이 고이고 눈자위가 붉어 질까봐 위로 치뜬 눈이 사발만 해 질 때까지 아래로 시선을 깔지 못했다. 펑펑 울어서 막힌 숨 토해 낼 법도 하지만 안으로 구겨 넣고 삭이려는 내심은 나만 슬픈 게 아니라는 것을 은연중에라도 나에게 보이고 싶은 이상한 심리의 발로이다.

나이가 들수록 슬픔을 이겨내는 인내심이 종잇장보다 더 얇아졌지만 드러내 놓고 울 수가 없었다. 드라마를 보고 눈물 흘리는 나를 보고 남편이 그 나이에 헤프다고 쇼크를 준 다음부터는 나잇값이라는 것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눈물도 나이를 봐 가면서 흘려야 된다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에 속아서 울 일이 있어도 숨어서 울어야 했다. 살다보면 슬픈 일은 누구나 겪게 되어 있지만 받아들이는 강도나 혹은 일의 경중에 따라서 느끼는 수위는 사람마다 다르다. 남이 슬프면 나도 슬픈 게 아니라 남의 슬픔이 나의 기쁨이 되는 상대적인 평가에선 냉정하게 분리가 된다.

슬픈 기억들로 하루를 보낸 날 밤은 유독 피곤하다. 나를 이기지 못할 싸움을 건 내 잘못이지만 부유물처럼 부옇게 떠다니는 슬픈 생각들을 속까지 홀랑 뒤집어서 툭툭 털어내는 것 또한 내 몫이다. 

나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있으면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은 더 많다는 세상 이치를

하루를 슬프게 보낸 날만이 깨달을 수 있는 유일한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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