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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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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실직고


BY 蓮堂 2006-02-21

 

딸애 앞으로 한통의 편지가 왔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도 없이 달랑 이름석자 뿐인데 글씨가 초등학생 수준이어서 더럭 의심이 갔다.  얼마 전의 전화 건이 생각나서였다.

밤이 늦은 시간에 걸려온,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이 가지 않는 이상한 목소리가 딸아이를 찾았다. 집을 떠나있는 딸아이에게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감지한 나의 예감은 불안감으로 옮겨갔다. 그 이상한 전화를 끊고 딸아이에게 곧바로 전화를 했더니 한참을 머뭇거리는 눈치였다. 내가 너무 걱정을 하니까 그동안의 일을 털어 놓았다.

올해 열아홉 살의 야학(夜學) 제자였는데 부모에게 버림받고 여기저기 떠 돌아 다니다가 누군가의 도움으로 야학에 들어 왔다고 한다. 그 무렵 딸애가 그 아이를 지도하게 되었는데 딸아이는 성격상 그런 아이들에게 더 적극적으로 관심과 애정을 쏟게 되었다. 그렇게 공부하던 아이가 절도 혐의로 교도소에 수감이 되었다. 딸아이는 그 아이가 가엾고 안타까워서 사식도 넣어주고 종종 면회를 가서 용기를 북돋워 주면서 새 삶을 찾는데 도움을 주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이가 정에 굶주린 나머지 딸아이에게 너무 집착을 해서 부담도 되고 겁이 났다고 했다. 그래서 면회 가는 횟수도 줄이고 어느 정도 선에서 손을 떼려고 하는 중인데 그 아이가 그것을 눈치 채었는지 자주 면회 안온다고 떼를 써서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한다고 했다.


혹시 그 아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차마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했다. 몇 번을 망설이다가 편지를 뜯어서 읽어 보니 그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다른 내용은 없었지만 하트모양을 글 중간 중간에 끼워 넣은 것도 눈에 거슬렸고 보내준 사진이랑 출소 후에 만나 달라는 내용은 딸아이에게 보여 주기가 불안해서 없애 버리려다가 봉투가 뜯어진 채로 숨겨 놓았다.

그러나 딸아이에게 숨기려고 해도 맘이 캥겨서 봄방학을 이용해서 집에 다니러 온 딸아이에게 편지를 내 놓으며 미안하다고 이실직고를 했다.

놀란 딸 아이는 엄마 답지 않다고 곱게 눈을 홀기더니 환하게 웃으며 ‘한 번이니까 용서 하지만 두 번은 안돼요’ 라고 하면서 너무 걱정 하지 마라며 내속을 꿰뚫고 안심을 시켜 주었다.


남의 편지를 먼저 뜯어본다는 건 아무리 부모 자식지간이라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런 상식과 예절도 요즘의 일이지 내가 어렸을 땐 턱도 없는 얘기다.

여고시절 학교에서 단체로 국군장병에게 반강제적으로 위문편지를 쓰게 되었는데 그 위문편지라는 게 거의가 비슷한 내용으로 시작해서 시시하게 끝나게 되어있다. 좀더 발전하는 친구들을 보면 사진도 교환하고 휴가 때 만나기도 했다는데 그건 남의 얘기로 알았다.

그런데 내 편지를 받은 군인은 몇 번인가 편지를 보내다가 급기야는 집주소를 알려 달라고 해서 별 뜻 없이 주소를 알려 주었는데 이게 사단이 난 것이었다.

겁도 없이 보낸 편지가 범 같은 아버님 레이더망에 '딱' 걸려들었다. 간이 배 밖으로 쏟아져 나온 요구를 구구절절이 써 댔다. 보고 싶으니까 사진을 보내 달라느니 휴가 나가면 꼭 만나달라느니...........

아버님이 눈에 불을 켜고 던져주신 편지를 읽고 있던 난 죽은 목숨이라고 생각하니 앞이 아득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연애질 한다는 소리를 듣게 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아버님의 불 같은 성질에 그냥 묵과 할 사안이 아니었다.

그러나 다행이 초범(?)인 관계로 일단 다리가 저리도록 꿇어앉아서 긴 시간동안 훈계를 듣는 것으로 끝이 났지만 그날 이후로 나에게 오는 편지는 아버님의 검열을 통과해야 했다. 그일 이후로 그 군인의 편지는 더 이상 받아 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겉봉에 여자 이름을 써도 나보다는 한 수 위이신 아버님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에 알고 지내던 남자 친구가 편지와 함께 중간고사 본 시험지를 보내왔다. 교무실로 나를 부른 담임선생님은 그 친구의 편지를 내 앞으로 던져 놓으며 누구냐고 물었다. 친구라고 했더니 고개를 비틀고 쳐다보는 폼이 믿기지 않는 다는 제스쳐였다. 편지 내용은 건조 할 만큼 건전했지만 간이 큰 이 친구가 본명을 그대로 써서 보냈기 때문에 심문을 받아야 했다. 당시 그 친구는 명문고에 다녔는데 보내온 시험지는 난이도가 장난이 아니었다.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날 보고 그 문제를 풀어보라고 하면서 과목당 80점을 넘지 않으면 반성문을 써야 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내 실력을 너무 과대평가하신 게 나를 더 곤혹스럽게 했다. 국어하고 영어 국사는 어느 정도 자신 있었지만 나머지 과목 특히 수학이나 물리는 차라리 백지로 남겨 놓는 게 덜 수치스러울 정도로 손을 댈 수가 없었다. 과목당 80점 이상이면 그 친구의 학교에서도 서울 대학 갈 수준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결국엔 반성문 쓰는 것도 그동안의 품행을 봐서 면제 해 주었지만 그날 이후에 난 선생님의 검열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나 뿐만 아니고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명도 통하지 않았고 엉터리 주소도 먹혀들지 않았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외부와의 연락할 체널은 모두 막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거의가 차단이 되어 있었지만 딸아이처럼 ‘용서’ 운운할 정도로 너그러운 시대가 아니었다.

유독 우리 집 우리학교만 유난스러웠는지는 몰라도 그래도 그때가 그립기만 한 건 이젠 부레이크 걸 어른들이 내 곁에 안 계신 현실이 너무 헛헛하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