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 신혼시절 이야기지만 요즘 새삼스레 그때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직업군인인 남편과 결혼하였는데 남편은 총각 때 근처에 살던 누나 집에서 출퇴근을 하였고, 어쩌다 보니 신혼방도 그 방에서 꾸리게 되었다. 문제는 이 때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큰 시누이의 막내아들, 조카가 6살이었는데 유난히 남편인 외삼촌을 잘 따랐다. 총각인 삼촌과 거의 한방에서 살다시피 하는 이놈은 삼촌이 결혼을 했는데도 남편이 퇴근해 오면 나보다 지가 먼저 달려나가 삼촌을 맞이하고, 밥도 우리와 같이 먹더니 밤이 되어 잘 시간이 되어도 영 안채로 가질 않는 것이다. 처음에는 귀엽다고 데리고 자곤 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신혼인 우리는 ,특히 남편은 내색은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는 소리가 밤마다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시누이도 신혼인 동생 방에서 버티는 조카녀석을 억지로 데리고 안채로 가면 어찌나 섧게 우는지 할 수없이 또 데리고 오곤 했다. 자리를 가장자리로 펴면 어린놈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처음에는 잘 자다가 어느새 둘 사이로 비집고
쏙 들어와 자니 남편의 애끓는 한숨소리만 밤새도록
내 가슴을 아프게 두드렸다.
한번은 어찌나 안 자던지 불 끄고 빨리 자라고 했더니
요 녀석의 말이 가당타.
"외삼촌 내가 텔레비전 끄고 잘 테니 먼저 자"
하하하---- 말을 말아야지.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일년이 되어도 임신소식이 없으니 시댁에 제사 지내려 가면 시할머니는 일하다 말고 힘들어 마루에 걸터앉아 쉬는 나에게 "야야, 몸이 고단나? 아~가 들어섰는갑다"
" 아, 아입니더.."
그러니 힘들어도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친정에 들러 엄마에게 속사정을 이야기하니 괜히 심란해 하신다. 당신이 워낙 어린나이에 시집가서 16살부터
아기를 출산하기 시작하여 결혼의 재미도 못 느낀 한 때문에
천천히 임신을 해도 되는데 뭐 하러 재촉을 하는지 못마땅해 하시면서도 행여 칠거지악에 걸려 소박이라도 당할까봐
부랴부랴 익모초에 대추를 넣고 물엿을 고와서 먹기 좋게 달여
한 통을 담아주시면서 아침저녁으로 잘 챙겨 먹으라 하셨다.
속이 냉하면 임신이 잘 안된다 면서 막내딸이 그저 안쓰러워
기차간까지 따라오시면서 혀를 찬다.
'먹으면 뭐해. 조카 놈 때문에 불안해서 제대로 일을 치를 수가 있어야지. '
그런데, 그 해 여름 남편은 나에게 희소식을 전해주었다.
"어이 봐라, 다음 주부터 충청도 서천으로 한 달간 하계훈련을 가는데
마지막 주 일주일은 가족들이 와도 된다 안카나.그란께 ...알았재"
눈을 찡긋하며 음흉한 미소를 짓는 남편을 보며
나도 속으로 야호를 외쳤다.
남편은 먼저 훈련을 떠나고 나는 가는 날만 꼽고 있다가 드디어 3주가 지나자 대강 짐을 챙겨 시누이에게 인사를 하러 안채로 들어갔다.
"형님, 다녀 올게요."
조카녀석의 울음 섞인 얼굴을 본 척도 안하고 배낭을 메고 대문을 나서는데..
어렵쇼, 뒤에서 앙~ 사이렌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조카녀석이 마당에 뒹구르며 큰 소리로 우는게 아닌가.
그래도 모른 척 나서려는데 시누이의 한 마디가 내 발목을
붙잡는 것이 아닌가.
"이노마 땜에 몬살겄다. 외삼촌하고 숙모하고 신혼여행이나
다름없는데 눈치도 없이 니가 와 자꾸 갈라카노."
결국 대문을 넘지못하고 되돌아와서 조카의 옷가지 몇 개를 챙겨 데리고
나서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시누이 아들만 아니면 한대 콕 쥐어박고 싶었지만
일러 바칠까봐 차마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어휴 내가 참아야지.
'서천'이라는 서해안의 바닷가에 도착한 나는 똑같은 유니폼을 입은 많은 군인 중에서
유독 내 남편만 눈에 띄었다. 그러나 나보다 더 빨리 조카녀석이 "삼촌"하며 내달렸고 남편은 조카를 보는 순간 요상한 표정으로 엉거주춤 우리를 맞았다.
우리가 신혼인줄 아시는 대대장님의 특별 배려로
멀찌감치 단독텐트를 숙소로 정해 주었지만 조카녀석 때문에
핑크빛 멋진 꿈은 일치감치 깨야 하니 괜히 속이 상했다.
짐을 풀 동안에 어느 새 조카녀석과 남편은 모래사장에서
공차기를 하며 신이 났고,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별을 헤아리며 바닷가의 파도소리를 들으며 환상적인 멋진 여름밤을 꿈꾸었는데 조카녀석 때문에 다 망쳤다 생각하니 어찌나 미운지 잘 때 녀석을 가장자리로 밀어내었더니 재빨리 우리 가운데로 쏙 들어온다. 어휴 밉상녀석~
애궂은 날짜는 하루, 이틀, 사흘 지나가는데 5일 째 되는 날,남편이 무릎을 치며 내 귀에 대고 소곤거린다.
"오늘 낮에 저 놈을 다운을 시킬 테니 기대를 하거래이. 크크크"
남편은 어린 조카를 상대로 질투의 여신 헤라로 변신하기 시작했다.
하루종이 뙤약볕에서 녀석과 공 던지기를 하고, 수영을 가르쳐준다고 바닷물을 먹이질 않나 녀석이 지쳐 주저앉으면, 억지로 일으켜 세워 달리기 시합하자며 모래사장을 뛰어다니게 했다.
해가 저 멀리 바다에 걸려 뉘엿뉘엿 넘어가려는데
저녁밥을 떠먹다 말고 녀석은 꾸벅 꾸벅 졸더니
그대로 KO 되었다.
남편과 나는 두 손을 마주치며 "아 자~"를 외쳤고
그 날 밤은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낭만의 여름밤이 되었다.
그 날은, 두 마리의 작디작은 물고기가 하늘거리는 꼬리를 힘차게 흔들며 극적으로 만나 아들놈의 탄생을 알리는 역사적인 날이 되었다.
그 얄미운 조카는 지금은 장가를 가서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딸에게 흠뻑 빠져 우리 집에는 명절 때만 다니러 온다.
공교롭게도 그 날, 8월 20일에 두 마리의 정자와 난자가 합쳐 만든 거룩한 생명체인 우리 아들이 지금 서천에서, 그 장소에서 해양훈련을 받고 있다.
아들은 그 사실을 모를 것이다.
26년 전 거기에서 지가 이 세상에 나오게 되는 시발점이 된 거룩한 장소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