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꿈
비 내리는 아침, 부드러운 물안개에 휩싸인 산 풍경이 어쩌면 살아 왔던 날들보다 더 오래된 기억처럼 흐릿하다. 구름에 엷게 가린 봉우리가 구름 띠를 두르고, 바람 따라 흐르는 물안개는 신비로워 보인다.
잎을 다 떨어뜨린 나무 가지들이 빗속에서 까만 맨살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제멋대로 자라 목덜미에서 부스스 흔들리는 머리카락만 같다. 한때는 푸르렀고 또 다른 시절엔 색깔 고운 단풍이 달려있어 보기가 좋았던 나무들의 어제는 세월 속으로 스러져 버렸다. 후․ 두․ 둑, ……비명을 마른 잎사귀에 남기고 길바닥에 추락하는 빗방울들, 시간 앞에선 모든 것들이 다 덧없다.
길거리에서 만났더라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쳐버렸을 한 사람이 불쑥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홀연한 그 느낌 때문에 몇 날을 고민 하다가 절로 올라갔다. 잠을 이루지 못해 새벽 군불을 때고 있는 공양 간 행자 옆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나에게 스님이 다가 오셨다. 그 시각에 군불을 때고 있는 공양 간에 스님이 오시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내 곁에 스님이 쪼그려 앉았다. 바스라질것 같은 노구, 그러나 그 작은 몸에서 범접할 수 없는 반듯함이 배어나왔다. 압도된다는 것은 스님 앞에 무조건 낮게 주저앉는 게 아니라 공손하게 순응하는 느낌이지 싶다. 스님은 태연하시다. 쪼그리고 앉은 앉음새는 나와 달리 편안했고 느긋한 여유가 보이기까지 하신다.
“불이 참 좋구나.”
주홍빛으로 타오르는 홍염紅炎의 그림자가 나란히 앉은 나와 큰 스님의 얼굴에 아른거린다.
활활 타 오르며 간혹 타 닥! 타 닥! 마른 가지의 줄기가 열에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내 마음속의 불순한 욕심과 번뇌, 게으름과 미련함, 눈물과 부질없는 웃음까지, 그리고……모든 것들이 한줄기 연기 속에 타 버렸으면 하고 소원한다.
내 마음을 아시는지 스님은 곁불을 쬐는 늙은 나그네처럼 흡족한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재미난 이야기 하나 해줄까? 옛날에 무착 문희(無着文喜)선사가 있었다. 그에게는 평생을 걸쳐 소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문수보살님을 한 번 친견하는 것이었다 말이다.”
바람을 이기지 못하는 낡은 문이 덜컹거리는 공양 간 아궁이 앞에서 긴장된 표정으로 스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 그는 나물을 캐면서도 문수보살, 문수보살, 물을 길으면서도 문수보살, 문수보살, 국을 끓이면서도 문수보살, 문수보살 했더란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시래기 국을 맛있게 끓이고 있는데 얄궂게도 펄펄 끓고 있는 국속에서 문수보살이 그만 고개를 쑥 내미는 것이 아니겠느냐……. 깜짝 놀란 채로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무착의 머리에는 그만 한 생각이 떠올랐단다. ‘문수 자 문수요, 무착 자 무착(文殊 自 文殊요, 無着 自 無着)’,이라 즉 문수는 스스로 문수요, 무착은 스스로 무착인데, 이게 웬 놈인고 하고 그만 문수보살의 머리통을 국자로 냅다 갈겼단 말이다. 그래서 문수보살은 혼비백산해서 물러가고 그는 태연히 국을 더 끓여 가지고 대중공양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아궁이에서 아른거리는 불기 때문이었을까. 졸음이 올려 한다.
“국을 끓이는 일은 진실로 국을 끓이는 일이고 불을 때는 일은 진실로 불을 때는 일이다. 이만하면 내가 뭘 일러 준 건지 알 터…….
스님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스님……”
막 잠에서 깨어났다. 꿈을 꾸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