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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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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저리 주저리


BY 土心 2006-12-07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책상 앞 창문으로 햇살이 부시게 들어옵니다.

근데 오늘은 저 해 미워요.

모처럼 학교 친구랑 등산 약속하고 청계산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거든요.

근데 아침에 비가 오잖아요. 망설이다 산행 취소했지요.

물론 감행 할 수도 있었지만 겨울비 맞고 산행하다 병나면~~~

엄살 반... 핑계 반...

사실 우리 아들 셤 기간이라 외출하기 부담스럽긴 했지요.

어쨌든 해는 나를 향해 메롱하고,

새로 산 등산복은 배시시 옷걸이에 걸려 섭섭한 듯 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ㅠㅠ


그래요, 주저앉은 김에 등산복 얘기나 할까요.

아니지 남편 얘기로 갈께요.

친구들이랑 등산가기로 했다는 말에 남편이 등산 장비 일체를 새로 사 주더군요.

점퍼, 바지, 셔츠, 모자, 신발, 배낭, 스틱, 양말, 판초우 까지....

이거 입혀 보고, 저거 입혀 보고....바지 길이도 재주고....수선 맡겼다가 찾아 까지 주고...

신경 쓰고, 시간 쓰고, 돈 좀 썼어요.

참 자상한 남편입니다.


그랬어요. 우리 남편 옛날부터...

내 옷이든 아이들 옷이든 자기가 손수 사 옵니다.

나는 무조건 좋다고 하지요.(근데 사실은 취향이 전혀 달랐어요)

안 맞아도 맞는다고 하고, 맘에 안 들어도 좋다고 하고,

남편이랑 동반 외출 할 때면 영락없이 그 옷 입어야 해요.

속으론 싫어 죽겠는데...절대 내색은 안하지요.

그런가하면 남편은 또 내가 사다주는 옷은 안 입어요.

결혼 초 남편 웃옷을 한번 사다 준 적이 있었는데

온갖 트집을 다 잡더니 결국은 매장 찾아 가서 바꿔다 입더라구요.

그 날 난 결심했지요.

‘이후 절대로 당신 옷은 내 손으로 안 사다 입힌다.’ 이렇게

거의 지금까지 그 결심 진행 중입니다.

허니 겉옷은 물론이고 양말, 속옷에 이르기까지 남편은 손수 해결합니다.

결과적으로 쇼핑 좋아하는 남편 취미생활에 난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셈이지요.


근데, 옷뿐이 아니고 생활 전반에서 그런 성향이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우리 집 가구나 가전제품은 거의 남편 선택입니다.

우리 집엔 내가 혼자 결정하고 들여 놓은 물건이 하나도 없어요.

말하자면 어느 날 출근한 남편에게서 전화가 옵니다.

“뭐 도착할 거다 받아라. 그리고 뭐뭐 그 물건 내 주면 된다.”

그게 다 입니다. 한마디 더 하자면

내가 운전면허 따가지고 오던 날(15년 전),

이미 집 앞에는 흰색 프라이드 한대가 서 있는 겁니다.

“축하 한다. 니 차다. 이제 몰고 다녀라.”

..........

짐작 되죠? 우리 남편 어떤 사람인지

.........

때때로 난 내가 참 신통하단 생각도 하면서 살았답니다.

그러나 물론 내 속아지도 뭐 그리 나긋나긋한 건 아니라고 살짝 고백하지요.

그런 내가 가다가다 한번씩 폭발하면 그동안 잘 참고 살던 공든 탑도 와르르....

왜 있잖아요.

평소에 이왈자왈 안하는 사람이 속은 심산유곡인 거.

여자들이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남편들 속수무책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이미 시효 다 지난 것 까지 들춰내면서 남편 잘못 만나 인생 꼬인 사람처럼

울부짖는 거 왜 그런 거 있지요.

몇 차례 나도 그랬어요.

남편 강하고 물러 남 없는 성격, 부러지면 부러졌지 절대 휘지 않는 성격,

불같은 성격, 아집으로 뭉친 성격.....

내가 들이댈 땐 ‘그래 이제 끝이다. 나 죽거든 잘 살아 봐라 어디!!’

그런 사생결단의 결심이 필요할 만큼 무서운 남편이랍니다.

참 맞추기 힘들구나~~~속앓이깨나 하며 살았습니다.


근데, 변해가요. 그리고 닮아 가요...아니 그냥 하나가 되어 가요.

너는 나이고, 나는 너이고...이렇게.

그렇게 취향이 다른 것 같더니 어느 날 보니 비슷해졌어요.

그렇게 성격이 다른 것 같더니 어느 순간 닮아 있어요.

늘 마주 보는 것처럼 긴장감이 팽팽했는데 어느 날 보니

남편과 나 한 곳을 보고 있더라구요.

말해야 다 아는 줄 알고 남편 향해 침묵하는 나는 늘 외롭다 생각했어요.

근데 어느 순간 보니 남편이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남편 맘자리에 내가 들 자리 없다 늘 섭섭했는데 어느 날 문득 깨닫고 보니

오히려 내가 남편을 온전히 들이지 않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결국 네 맘 내 맘이 그랬구나~~ 깨달았습니다.


이젠 억지로 좋은 것이 아니고, 좋은 척 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좋고 편합니다.

남편이 골라 주는 옷이 내 맘에 딱 들고, 들고 오는 물건들에 불만 없습니다.

아직도 일방통행이고 권위적이긴 하지만 이젠 그것이 책임 있는 가장의 행동이라는

나름대로의 과시고, 자신감이구나 하고 봐 줍니다.

어려서부터 부모 떨어져(부여하고도 촌에서 중학교 때부터 도시로 유학) 객지에서

눈칫밥으로 배곯았다는 남편이고,

선보고도 내가 맘에 들어서라기보다는 처가가 될 부모 형제간의 화목함이 좋아서

그 따뜻한 부모 정이 좋아서 선택했다는 남편이고 보면 이해 못할 일이 아닙니다.

뭐든 너무 잘하고 싶고, 크게 성공하고 싶고, 식구들에게 최고로 해주고 싶고...

그것을 목적으로 살아 온 자수성가형 남편을 이젠 십분 이해하고 협조하려고 합니다.


작금을 사는 우리 세대 가장을 두고 최고로 불쌍한 세대, 마지막 바보세대....

그런 등등의 연민어린 수식이 붙어 있는 기사를 얼마 전 보았습니다.

진정 공감합니다.

또 우리세대를 보고 “영올드”라고도 하더군요.

젊었다고 하자니 늙었고, 늙었다고 하자니 젊었고....

평균 수명이 늘어나는 바람에 애매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는 뜻 일 텐데,

그러고 보면 우리 이제 반 밖에 안 살았을지도 모르는 이 끔찍한 상황에서

남편과 아내의 협동과 합심, 화합은 더 절실할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은 쓰다 보니 주제도 없고 두서도 없는 어수선한 글이 되고 말았지만

그냥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수고한다는 말, 힘내라는 말도 하고 싶었습니다.

아울러 비슷비슷 가장 노릇을 하고 있는 내 동창, 선후배들에게도

마찬가지 맘으로 썼습니다.


면전에선 차마 못하는 간지런 말..그냥 그 말이 하고 싶어서....


모든 남편들이여, 가장들이여,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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