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부
올 겨울 들어 몇번인가 눈이 내렸다.
이미 학교는 방학을 했고, 가슴 한벌판을 가차없이 베어내던 잔혹스런 11월도 지나 이젠 마지막 남은 12월 한달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 그 후로 민주오빠도 안 우석도 소식이 없다. 비록 그들 앞에서 두사람 모두에게 이별을 선언했던 나였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런 나의 행동에 자신이 없어지기 시작했고, 어느누구라도 빨리 연락해 주었음하는 기다림에 더더욱 나의 마음은 갈곳몰라 하고 있었다.
"야! 방학전부터 어째 이상하더니 이젠 방학했다고 완전히... 겨울잠 자냐? 왜 그렇게 얼굴보기 힘들어? 우리 오늘 좀 보자."
크리스 마스를 몇일 앞두고 지은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비록 친한 친구이지만 도저히 그간의 일들을 얘기할 수 없었다.
만약 이 민주와 나와의 이런 미묘한 관계를 안다면 지은인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야! 여기야."
오후 햇살이 블라인드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창가쪽 테이블에 이미 와 앉아 있던 지은이가 손짓한다.
"어디 아픈거니? 왜이리 핏기가 없어?"
카페안은 이미 추리장식으로 연말분위기를 한층 고조시키고 있었다.
아... 벌써...
이제 스물셋이 되는건가...
"그래, 잘 지냈구?"
한동안 못봐서인지 지은인 쉴새없이 그간의 세간얘기를 쏟아냈다. 그사이 누구누구가 C.C가 됬다느니, 연예인 누구가 결혼한다느니...
먼나라 얘기로만 들리던 지은이의 입담속에 나를 놀라게 하는 사건이 있을 줄이야...
"야, 너 기억하니? 왜~ 우석씨 사촌형인 이 민주라는 사람 말이야.
우리... 훗, 글쎄 그사람 국비 장학생으로 유학간대. 얼마전에 그 사람 한테서 전화가 왔지 뭐야. 그래 그뒤로 쭉 만났거든. 아무래도 국내도 아니고 해서 왠만하면 결혼해서 나갔음 한다고.. 훗. 나만 괜찮으면 말이야. 무리라면 약혼이라도 하재나~ 훗훗 "
갑자기 내 주변의 모든 사물들이 정지해 버린 듯한, 내 심장 박동소리만이 요란하게 내 귓가를 울린다.
블라인드 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왜이리 강렬한지... 아... 어지럽다...
난 도저히 되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은인 여전히 계속해서 무언가를 얘기하고 있는거 같은데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저... 결혼... 약혼... 그 두 단어만이 쉼없이 내 귓가에서 맴돌뿐...
"저... 지은아, 그러니까... 민주오빠가 너랑 결혼, 아니 약혼하자고 그랬단 말이야?"
"어머 얘좀봐. 아까 뭐 들었어~ 참, 아무리 우석씨 사촌형이라구 오빠가 뭐냐. 좀 이상하다 야. "
"아... 미안, 미안해. 너무 갑작스런 얘기라 놀라서... 다시 한번 말해봐. 뭐라구?"
"그래. 믿기 어렵겠지. 에프터신청도 하지않던 사람이 어느날 갑지기 약혼이니 결혼이니 하니까. 사실 나도 처음엔 당황했다구. 근데 사실 그만한 사람 내가 앞으로 잡을 수 있을거 같지도 않구, 솔직히 말해 남편감으로 어디하나 빠지는게 없잖니. 대학졸업한다고 취업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구, 까짓거 남자가 원하는데 괜찮치않냐?"
왜... 왜 갑자기 그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하는걸까...
혹... 나로 인해?
"2월달에 출국이라 1월달에 약혼이든 결혼이든 하자는데 아휴, 이참에 학교도 아예 그만두고 결혼해서 미국에 같이 가버릴까 어쩔까 생각중이야. 민주씨도 내 졸업장에 그다지 미련없다니 까짓거 굳이 2년더 등록금내고 다닌다고 별거 있겠니. 아휴... 그래서 너랑 의논할려구 나오라 했어. 어때? 니생각은 ?"
시야가 흐려졌다.
아... 지은이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없어. 그래선 안돼.
민주오빠의 생각할 시간이란게 고작... 이런식의 결론을 내릴수 밖에 없단 말인가...
나는 지은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허겁지겁 그녀를 뒤로한 채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마도 내 행동에 의야해 하겠지만 그러나 더이상 그자리에 앉아 있을 순 없다. 이 민주의 그러한 결정에도 화가 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지은이, 내 친구마저도 희생양이 되어야 한다니...
그럴순 없다. 아니... 결코 있을 수 없어.
... 막아야 해...
한달이 다 되도록 안 우석도 연락이 없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건 안 우석에게 전화하는 것이다. 이 민주의 행동을 막아달라고...
"오랜만이에요. 우리 만날 수 있을까?"
********************************
25일만의 공백기를 깨고 안 우석과 재회를 했다.
10여년이란 세월보다 단 25일의 시간이 더욱 길게 느껴졌다.
안 우석도 많이 수척해 있었다. 그 25일의 시간이 이 사람에게도 결코 편한 시간일 수 없었으리라...
"나... 오늘 지은일 만났어요. 그리고... 민주... 오..빠 얘기 들었어요. 저..."
"그래. 네가 들은 대로야. 형은, 물론 지은씨한테는 미안한 얘기지만 어쨋든 형은 최선의 방책이라고 했어. 아니, 최선일순 없겠지만 비록 후회한다 해도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고 했어. 나 역시 그런 형의 결정에 어이 없지만... 결국 결정은 본인이 하는 거니까..."
안 우석의 까칠한 입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피곤해하는 기력이 역력했다. 안스럽기 그지 없으나 안 우석의 답변은 나의 언성을 높이기에 충분했다.
"그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죠?
어떻게... 어떻게 그럴수 있어요? 그래, 우석씨가 그렇게 존경한다고 했던 형을...
막았어야죠. 우석씨가 막았어야죠. 남자끼린 못할 얘기, 숨길 얘기 없잖아요. 그래 나라는 애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랑 살겠다구? 그럼, 그렇게 하면 내가 맘편하게 우석씨랑 결혼할거래요? 우석씨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더이상 민주오빠를 말리지도..."
"그만해. 함부로 말하지마. 차라리 직접 가서 얘기하지 그래. 응? 스물몇날을 너와의 인연으로 인해 괴로와할 만큼 괴로와했어. 너한테 이런 고통스러운 말들 듣고 싶지 않아. 나한테 추궁하지도 말구..."
할 말이 없었다. 정말이지...
......
"... 미안해. 소리질러서. 형도.. 나도... 괴로왔다. "
안 우석은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물었다.
담배연기를 못맡는 나 때문에 나와 만나면서부터 담배를 끊어버린 그가 어느새 짙은 담배연기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 끝자락이 금새 금새 빨갛게 달아 올랐다. 어느새 탁자위의 작은 옹기속엔 담배꽁초 몇개가 자리를 틀었다.
"미안해요. ... 갑작스런 일들이라... 우석씨한테 화낸거..."
"됐어. 이해... 할수 있어. 비록 그런식으로 물러서 버린 형이 ... 사실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날 비참하게 만들지만 한편으론 부러워.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석씨... 제발... 그런 식으로 빈정대지 말아요."
"빈정? 빈정댄다고? 훗. 난 정말이지 형이 부러워. 넌 결코 형을 잊고 있는게 아니야. 단지 그렇게 믿고 싶은 것 뿐이지. 그런 널 미치도록 좋아하는 내 자신이 돌아버릴 정도로 화가 나. 알아?"
더 이상 아무말도 건낼 수 없었다.
"미안해요. ... 정말이지..."
"미안, 미안. 그 미안하다는 말 그만해. 니가 뭐가 그리 미안 하다는 건지...또 미안한 걸 안다면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 노력해야 하잖아. 말로만, 말로만 미안하다고 하지마."
......
그의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무책임한 행동들... 나의 미지근한 행동들이 이렇듯 우리 세사람을 혼동의 구덩이 속으로 밀어넣었는지도 모르겠다.
"형이 그런 결정을 한건... 그래. 널 너무 사랑해서 일꺼야.
비록... 전엔 형이 물러나 주길 바랬어. 그래서 형한테 소리도 질러 봤구 주먹도 날려봤지. 헌데 막상 형이 그런 결정을 하고 나니까 ... 도저히 흔쾌히 찬성할 수 없더라구. 아까 네 말처럼 얼씨구 잘됐구나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나 그럴 수 없더라구. 그건... 그건 말이야. 그래... 형의 아픔을 알기 때문이야.
내가 너를 너무 사랑해서 무작정 매달리듯이, 형도 널 너무 사랑해서 무 자르듯 너와 연결되었던 지난 10여년간의 세월에 등을 돌릴 수 밖에 없는...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결정을 내려야 했던 형의 아픔을 알기 때문이야.
사실 시간이 흐를 수록 나... 자신이 없어졌어. 사실 네가 날 안만났더라면 어쩜 형과 넌 그리움의 결실을 맺었을 런지도 모르지. 결국 나때문에 이렇게 ..."
"우석씨, 그런식으로 자신을 학대하지 말아요. 우석씨를 좋아한건 바로 내가 내린 결정이니까 , 아니 내 감정이 변한거니까... 누구의 강요도 없었어요."
"아냐. 내가 널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런 생각이 날 떠나질 않아. 결국 널 형에게 맡기고 싶었지. 그렇게 하는게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줄 수 있는 길이라고...
그런데... 어느새 형이 먼저 결정을 내려버린 거야. ...
널... 계속 지켜달라고... 변함없이 사랑해주라고...
내가 포기하겠다고도 말해봤지만 소용없었어. 그래, 형은 그런 사람이야.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지. 형은 네가 없는 나의 삶조차도 걱정한 거야. ... 결국 형이 아우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맡기기로 한 거지.
...더 이상 형에게 무어라 할 수 없었어. 물론 지은씨한텐 더더욱 말할 수도 없었구..."
"하지만... 하지만 이건 아니야. 이래선 안돼요. 지은이 삶까지 엉망이 되게 할 순 없잖아요."
"그래. 그건 나도 동감이야. 네가 직접 형을 만나서 얘기해봐.
...난... 아무래도 좋아. 네가 형을 선택한다 해도... 나... 괜찮아. 견딜 수... 있어. 네가 행복할 수 있다면... 더군다나 형이라면... 널 안심하고 맡길 수 있어. "
"우석씨. 제발... 흐흑. 난 어느 누구에게도 안가요. 민주오빠한테도, 이렇게 자신없어하는 우석씨한테도... 다만 ... 나로 인해 민주오빠가 불행한 삶을 살게 할 순 없는거구... 결코 이런 식으론 우리 세사람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요."
......
. 결국 아무런 대책도 없이 안 우석과 나는 돌아서야 했다. 다시 만날 약속도 없이...
어찌해야 하나...
지은이한테 속사정을 말할까...
아니야. 그전에 민주오빠를 만나야 해.
하지만 그런 결정을 한 오빠가 날 만나줄까...
자신의 결정에 아마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정대로 실행 할 수 밖에 없다고 믿고 있을 해바라기 같은 남자...
나는 과감히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오빠랑 통화할 수 있을까?"
"요즘 무슨일이 있는지 계속 늦게 들어와. 안 마시던 술도 하구. 오늘도 자정 너머서나 들어 올텐데... 아마도 너때문에 괴로와 하고 있는 걸텐데... 제발..."
순주의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끝까지 듣지않아도 무슨 소리가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있으니까...
민주오빠는 나로 인해 그렇게 결정지을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거야...
이대로 오빠를 불행하게 놔둘 순 없어. 지은일... 지은이를 만나야 해.
"여보세요.
지은이니?
나... 할말이 있어.
지금 곧 만나자."
......
<다음은 마지막회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