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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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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속으로(16부)


BY 로렐라이 2003-11-10

  16부

  안 우석과 이 민주, 그리고 나는 나란히 벤치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쉽게 우리의 침묵을 깰수 없을 것만 같다.

  이 민주, 안 우석 그 어느 누구도 먼저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나만 아니였다면 이들은 여전히 좋은 형과 아우로 지내고 있을텐데...

  정말이지 사람관계는 시간문제라더니...

  "둘다... 나오느라... 어쨋든 미안해요. 나로 인해..."

  ......

  "나 두사람 모두한테 얘기할 것이 있어서... 아니, 더이상 나로 인해 두사람 모두 힘들어하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 나 ... 늦긴 했지만 결심했어요. 아무래도 이게 우리 세사람에게 있어 최상의 결론이 아닌가 싶어요. 둘다 내가 내리는 결정에 동의해 주길 바래요. 아니, 동의 치 못한다 해도 날 위하는 길이라 생각해 주고 내 뜻대로 따라줘요."

  아무 영문도 모른채 불려나온 두사람 모두 동시에 나를 응시했다. 나의 입술에서 무슨 말이 튀어 나올지 귀기울이며...

  "나... 두사람 모두 자유롭게 해줄게요. 아니, 내가 두사람에게서 자유로와 지기로... 그러기로 했어요. ... 두사람 모두에게서..."

  갑자기 안 우석이 벌떡 일어났다.

  "뭐라구? 지금 그게 무슨 뜻이야?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건 뭐고 자유로와 지겠다는건 또 뭐야, 응?"

  "제발... 우석씨,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줘요. 나... 많이 고민했어요. 두사람, 아니 우리 세사람 모두에게 가장 좋은 해결책이 무언가 하고...

  그래요... 흐흑...

 난 10년이란 세월, 그래요. 많은 시간 민주오빠가 그리워서 울어야 했어요. 바보스럽게 눈물로 날 달래야 했죠. 헤어지라 한 엄마를 원망하면서, 거기에 저항하지 못한 날 원망하면서, 그리고 역시 쉽게 포기해버린 오빠를 원망하면서 말이예요.

  오빠를 잊어보려고 학교선생님도, 교회선생님도 좋아해 봤어요. 하지만 그 모든것들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달았죠. 그들은 오빠를 대신할 수 없었어요. 결국, 난 오빠에 대한 그리움 속의 틀에 날 가둘수 밖에 없었구...

  내 지난 10년이란 기간... 정말이지 어두움 그 자체였어요.

  그런데... 그런데 우스운건 말이죠.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렇게 목이 매이고 절대 불변할 거 같았던 갈망들이 하나둘 옅어지기 시작했어요. 사실 오빠가 사는곳을 알아낸지는 꽤 됬지만 선뜻 찾아 나서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거예요. 비록 오빠를 잊지 못하는 건 10년 내내 변함이 없었지만 그러나 서서히 이것저것 내 편의에 맞춰 합리화 하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요. 난 현실적이 되어 갔어요.

  우린 동성동본이기 때문에 결혼이란건 불가능 하리라... 그렇다면 오히려 이렇게 기억저편에 묻어두는 편이 더 나으리라고 말이예요. 물론 정말 사랑한다면 동성동본 같은거 ... 문제되지 않을런지도 모르죠.하지만 난 현실을 무시하며 살기엔 너무속물인가 봐요...

  그런데 어느날 안 우석이란 남자가 내 삶에 뛰어든 거예요.

  비록 민주오빠에 대한 배신감이라고 내 자신을 꾸짖으면서도 안 우석이란 사람에게 내 마음의 자리를 내어주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더더욱 오빠의 존재는 내게서 작아지기 시작했구...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빠를 타인화했다는 건 아니예요. 다만 오빠에 대한 그리움을 안 우석이란 사람에게서 채워갈 수 있었어요. 그렇게 ...그렇게 변하고 있는 내게 민주오빠가 나타난거예요.

  난 무서웠어요. 두려웠어요. 죄책감, 배신감등이 날 견딜수 없게 했어요. 그리고 중요한건 안 우석으로 인해 민주오빠에 대한 나의 그리움이 사그라든 줄 알았는데 다시 오빠를 만난 순간 난... 흔들리기 시작했어요. 그런 내 모습이 날 더더욱 혼란스럽게 했어요. 하지만... 이미 내 마음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또 다른 인물을 무시할 수 없다는 걸 알았죠. 비록 우석씨를 처음엔 민주오빠에 대한 그리움때문에, 그 그리움을 삭이려는 방편으로 삼은게 사실이지만 서서히 우석씨를 좋아하게 됐고 결혼얘기가 오가도 그다지 거부하고 싶지 않은 상대가 되어갔어요. 만약 민주오빠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난 아마도 우석씨와 결혼했을테죠. 그래요...

  그런데 민주오빠의 등장이 날 다시 흔들리게 하는걸 보니 우석씨에 대한 내 감정이 진실하지 못했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분명 민주오빠에 대한 미련은 없다고, 과거의 인물로 치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재대로 실행하지 못하는 ... 결단없는 내 행동들... 결국 난 못된 계집애라는걸 알았어요.

  ...

  난 이제 이 민주라는 기억속의 사람도, 안 우석이라는 현재의 사람도 사랑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어요. 아니, 지금도 나... 사실 무얼 말하려는지 모르겠어요. 흐흑...

  미안해요. 민주오빠한테는 끝까지 오빠를 내 마음속의 주인으로 지키지 못해서, 그리고.. 우석씨한테는 비록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고 있는건 사실이지만 기억속의 사랑에 이렇게 쉽게 흔들릴 정도의 깊이밖에 안되는 사랑을 해서 ... 미안해요. 정말이지..."   

  "네 의견에 동조... 할 수없어. 말도 안돼. 어느 사람도 첫사랑을 잊어버리진 않아. 누구나 가슴속에 묻고 있는 거라구. 착각하지마. 혼동하지 말라구. 그건 애틋한 감정일 뿐 현재형이 아니라구.

  만약 옛기억에 대한 책임을 평생지고 살아야 한다면 아무도 다시 사랑할 수도, 결혼할 수도 없을 거야. 나... 널 이해할 수있어. 니가 너무 여려서 그래. 그런거야.

  정은아... 제발 진정하고 다시 생각해 보자. 말도 안돼. 형, 얘기좀 해봐요. 10년전 일을 이제와서 책임져야 하나요? 그게 ... 그게 형이 정은이한테 해줄수 있는 사랑인가요? 오히려 이젠 그 과거의 기억속으로부터 정은일 자유롭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 정은아... 제발..."

  "우석씨... 날 용서해줘요. 그래. 우석씨말 틀리지 않아요. 하지만 옛사랑이 나타났다고 해서 쉽게 흔들릴 수 있는 사랑. 그런 깊이없는 사랑에 당신을 희생시킬 순 없어요. 그리고 우석씨랑 이대로 결혼한다해도 난 아니 우리둘 모두 후회하고 말거예요."

  "이해할 수없어. 말도 안돼. 니가 무슨 열녀 춘향이라도 돼?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야. 내가, 내가 이해할 수 있다는데 무슨 사설이 그렇게 필요한 거야?"

  안 우석은 나의 말들에 분개했다. 반면 이 민주는 시종일관 침묵했다. 몹시 괴로와하는 모습임이 역력했지만 입밖으로 아무말도 꺼내지 않았다. 안 우석도 지쳤는지 더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한시간 가량을, 비록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속해있으면서도 서로의 틀을 꾸역꾸역 되새김질 하고 있는 듯했다.

  한참 후 그런 분위기를 깬건 이 민주였다.

  "그래... 우석이 너 말대로... 과거는 과거일 지도 모르지. 그래. 난 정은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지 이렇게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코 이런걸, 이런 상황을 바라진 않았어. 미안하다.

  내게 있어 첫사랑이 소중하듯 우석이 너도 니곁의 정은이가 소중할 테지... 아...

  우리 시간을 갖자. 정은이가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 셋 모두가 정말 행복해 질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 비록 그 길이 내가 돌아서야 하는 길이라해도... 그래.

  어쨋든 시간을 갖자. 단 하루만이라도 말이야."

  이 민주는 자리에서 힘겨운 듯 몸을 일으키곤 횡한 운동장 벤치에 안 우석과 나를 뒤로 한채 어둠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의 ... 어둠속으로 자취를 감추는 그의 뒷모습은 10년전 그를 마지막으로 본 , 바로 그 뒷못습과 똑같았다. 추워서일까... 간헐적으로 흔들리는 그의 뒷모습이 그가 사라진 후에도 오래도록 나를 그자리에 얼어붙게 했다.

  바람과 어둠을 가르며 간간히 들리는 어느 남자의 허탈한 웃음소리들...

  나를 부르는 안우석의 허스키하게 변해버린 목소리에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는다.

  "정은아, 난 도저히 너의 그런 결정에 동조할 수 없다. 나역시 너, 형, 나 모두 행복해 지길 바래. 그러나 네가 말한 건 최상의 방법이 아니야. 물론 날 선택하는 것도,또는 민주형을 선택하는 것도 결국 네겐 힘겹고 어쩜 평생을 선택받지 못한 사람에 대한 죄의식을 짊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지만 말야. 하지만 만약 나도 민주형도 다 포기한다면 넌 더더욱 깊은 절망속에서 살꺼야.

  정은아 부디 좀더 현명한 판단을 하길 바래. 지금 네 행동은 그저 현실에 대한, 까다로운 문제를 풀기 싫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이런식으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아. 어쩜 민주형 말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가자. 집까지 바려다 줄께..."

  안 우석은 앞장서서 어둠을 헤쳐가기 시작했다.

  10분거리도 되지않는 길을 우린 몇시간만에야 간신히 도착한 듯 했다. 더이상 안 우석 역시 무어라 결론 짓지 않았다.

  이 민주, 안 우석, 그리고 나에게 다시금 마지막 선택의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 계 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