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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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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속으로(12부)


BY 로렐라이 2003-09-30

  12부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모냥 이미 끊어진 수화기를 무릎에서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비로서 1시를 알리는 시계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얼떨결이었지만 나는 그와, 이 민주와 2시에 만나기로 약속한 터다.

  이제... 1시간...

  1시간만 지나면 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그러나 지금은 나를 너무나 혼란스럽게 하는 이 민주를 만나는 것이다.

  나는 그제사 정신을 차리고 나갈 준비를 서둘렀다.

  여전히 나의 얼굴은 창백했고 잠을 제대로 못자서 피부도 거칠어져 있었다. 나는 화장하는 것을 포기해야만 했다. 내 얼굴은 누가 봐도 몇일을 끙끙 앓은 사람인 줄 단박에 알아볼 것이다.  하지만 10년만에 만나는 그에게 만큼은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다.

 간신히 몸을 추스려 현관으로 걸어나오는 순간, 또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무시해 버릴까... 아니, 혹 민주오빠가 나와의 만남을 취소하려는 건지도...

  "여보세요?"

  "정은이? 너, 정말이지... 휴... 목소리 정말 듣기 어렵다. 얼굴보기도 힘들고... 어떻게 된거야?  몇일전엔 일방적으로 전화도 끊어버리고... 나한테 화난거 있어?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냔 말이야."

  안 우석의 목소리는 히스테리에 가까웠다. 그럴만도 했지...

  "미안해요... 정말... 우석씨한텐 자꾸 미안하다는 말만 하게 되네..."

  "정은아. 오늘 좀 볼수 있니? 내가 갈께. 응?"

  "안돼요. 나... 지금... 실은 엄마랑... 병원에 가려던 참이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있어요. 내가 저녁때 다시 전화할 께요."

  "그래?  딸자식때문에 너희 어머니 걱정이 태산인거 아냐? 제발 속좀 그만 썩이고... 그럼 병원에 잘 다녀오고 이따 내가 다시 전화 할께."

  돌이킬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는 기분이다...아...

 

                                     *************************************

 

  점심시간 무렵이라 거리는 식당을 드나드는 무리의 사람들로 붐볐다.

  약속장소에 도착했을땐 이미 2시가 지나 버렸다.

  분명히 저 문을 열면 그곳에 나를 기다리는 이 민주가 앉아 있을 것이다.

  손을 내밀면 닿을 곳에 손잡이가 있었다. 그러나... 쉽게 내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니, 잡을 수 없다.

  비록... 내가...  10년동안 그토록 보고 싶었고, 찾아 해맸던 사람이지만... 이젠 시간의 기억 저편으로 서서히 묻혀가는 중인데...

  또한 지금 내 곁엔, 내가 10년간 이 민주에게 쏟았던 열정만큼이나 나에게  전부를 쏟아붓고 있는 남자가 있는데...

  안 우석...

  그를 차마 무시할 수 없다. 물론 안 우석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난 아마 지금 이순간도 이 민주라는 사람에 대한 과거속의 기억에서 해메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 우석을 만나면서 점점 그 과거의 시간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이젠 서서히 안 우석에게 내 마음을 열어 보이고 있는 데...

  내가 처음 안 우석에게 마음이 끌리면서 이 민주를 배신하는 게 아닌가 싶어 괴로왔듯이 지금의 이러한 행동들 역시 안 우석에 대한 배신감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 절망감 때문에 저 문을 열수가 없다.

  나는 뒤돌아 섰다. 아니, 이미 내 마음은 저 문을 뛰어 넘어 갔는지도 모른다.

  이 민주 ...

  그는 내가 올때가지 기다릴 것이다. 10년전에도 항상 그가 날 데리러 와 주었고, 또 바려다 주었듯이...

  미안해요... 오빠...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길은 그대로 였으나 오는 도중 스쳐간 사람들은 다신 만날 수 없었다. 무수히 많은 사람과 스치지만 그 수 많은 사람중에 내 인생항로에 끼어들 사람은 몇이나 될까... 평생 한번도 마주치지 못하고 살 사람이 태반이건만 갑자기 이런 저런 생각들이 날 슬프게 한다.

  이젠 잊자. 잊어야 한다. 그만큼 시간이 흘렀으니까...

  하지만...

  어느새 집앞에 다달았다. 실성한 사람모냥 무작정 앞만 보고 걸어 왔나 보다.

  "정은아!"

  아 ... 안 우석이었다. 이미 그는 나와의 전화통화 후 날 만나기 위해 내게 달려온 것이다. 이런 그를 어떻게...

  그는 차에서 내려 서서히 내게 다가왔다. 몇일 동안 만인가... 그 역시 수척해 있었다.

  나로 인한 마음의 고통때문 이리라...

  "우석씨..."

   나는 그의 목에 매달렸다.  아니 이 사람에게 매달리고 싶다 . 날 놓지 말아 달라고...

  그는 나의 갑작스런 행동에 주춤했지만 곧 나의 마음을  해아려 포근히 감싸안아 주었다.

  " 정은아 보고싶었다. 사랑해."

  더이상 말이 필요치 않았다. 아니, 필요치 않다기 보다는 말을 할 경우 나 자신을 변명하려 들지도 모른다. 더이상 이 사람을 피곤케 하고 싶지 않다.

  "자, 바람좀 쐬러 가자."

  우리는 차로 도심을 빠져 나왔다.

  가을 풍경이 눈앞에 물밀듯이 밀려오고 있다. 이미 벼배기가 끝나버린 황량한 모습을 담은 논 바닥들이 듬성듬성 여기저기 눈에 띈다. 저 멀리 산에는 서서히 단풍이 들려 한다. 하늘의 구름은 우리에게 연신 길을 열어주고 있다.

  그는  어느 저수지에 차를 댔다. 이미 그곳은 낚시에 미친 듯한 강태공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진지했고 우리와는 별개의 세계에 있는 듯 하다. 우리는  한가한 쪽에 자리를 잡았다.

  "어디에 다녀오는 거였어?"

  "응?"

  "실은 너 오기 훨씬 전에 니 집에 도착했었어. 그래서 어머님을 뵈었거든... 넌 내게 엄마랑 병원간다고 했는데... 어머닌 그런 얘기 모르시더라. "

  "우석씨..."

  "응?"

  "사랑... 이란게 뭘까... 정말 변하지 않는 사랑이란게 있을까?"

  "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해? 사랑은 말로 표현하기가 좀... 글쎄... 너에 대한 내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듯 사랑은.. 그래. 느낌이야. 뿌듯한. 이성으로서가 아닌 감성적인 영역에서..."

  "만약... 우석씨가 나와 헤어진다면 ... 우석씨는 다시 사랑을 안할까... 하겠지. 아니, 당연히 할 거야. 나 역시 그럴테구...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이의 사랑이란게 얼마나 허무해..."

  "정은아 . 왜 이별을 걱정해? 우린 이제 시작했어. 그리고 그때그때의 감정에 충실하는 거야. 만약 우리에게 끝이 있다면 ... 그건 우리가 생을 마감할 때일 거야."

  단호한 그의 대답에 묘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우석씨는 첫사랑을 기억해요?"

  나를 쳐다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건너에서 노니는 한쌍의 백로에게 눈길을 주고 있었다. 한낫 미물에 불과하지만 저들도 사랑에 굶주렸는지 연신 서로의 목을 비벼대고 있다.

  "첫사랑... 그건사람들을 성숙시켜주는 묘약과도 같은 거지. 그래. 나도 선생님을 좋아했었지.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비록 지금은 유치했던 기억으로 남아있지만 참 우스워...참 좋은 추억거리야. 사람들에게 그런 기억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인생이 무미건조할까..."

  "혹... 첫사랑을 못 잊고 평생 그 맛에 젖어사는 이가 있을까..."

  "모두들 첫사랑에 대한 기억세포 몇개쯤은 가지고 있지 않겠니... 아마 무덤까지도 가지고 갈껄. 훗. 다만 거기에 연연해서는 안돼. 자신의 인생을 저당잡혀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새로운 사랑이 다가와도 이미 눈과 귀가 멀어버린 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니. 연연해 하지 않을 때, 매달리지 않을때 과거가 아름다울 수 있는거야. "

  그 순간 두마리중 한마리의 백로가 먼저 날아 올랐다. 조금후 나머지 백로도 앞선 이를 따라 비행한다. 나도 저들처럼 살고 싶다...

  안 우석은 살며시 나의 어깨를 감싼다.

  "사랑해..."

  그는 내귀에 대고 속삭인다.

  사랑한다고...

  나도 .. 나도 그러고 싶다.그러나...

  "참, 우리 사촌형 말이야. 널 아는 눈치던데... 세상이 좁긴 좁은가봐. 정은이도 기억해?"

  갑작스런 혼란속에 내동댕이 처지는 기분이다.

  "응? 날... 어떻게 안다고 그래요?"

  "응. 그 형 동생과 정은이가 동창이라던데... 이 은주라는 앤데 기억나?"

  "응... 그래. 이 은주..."

  "언제 한번 동창회 모임을 가져야 겠다. 하하..."

  한번 꼬이기 시작한 실타래의 끝이 보이질 않는다. 어느 한 곳을 잘라내기 전에는...

  우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서로의 안부를 챙기며 헤어졌다.

 

                                          **************************************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불도 켜지 않은채... 그렇게 안 우석과 이 민주의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따르릉...전화밸 소리가 왠지 아늑하게  멀게 느껴진다. 

  "여보세요?"

  "정은이?"

  "누구... 시죠?"

  "나야... 민주..."

  "... 미안해요. 아직까지 거기 있는 거예요? 갑작스런 일로..."

  "방금까지 약속장소에서 정은일 기다렸지. 여기 정은이네 옆 초등학교야. 이리...나와줄 수 있겠어?"

  "......"

  "기다릴께."

  "저..."

찰칵.

  10년전. 내가 그에게 남긴 마지막 소리를 되돌려 받는 기분이다.

  이 망막함이라니...

  10년전 그도 이랬을까...

  그는 오후내내 창문너머로 내가 들어오길 기다렸듯이 이밤도 찬 공기 속에서 나를 기다리겠지... 그러기에 더더욱 나갈수 없는 내 이마음이  밉다.

 

                              *********************************

 

  밤바람이 무척 차갑다. 거리도 한산하다. 10여분이면 가는 거리가 1시간을 걷는 기분이다.

  아 피곤하다...

  학교 교문은 반만 열려져 있었다.

  저만치 벤치에 누군가 앉아 있는 듯 했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는 지 조금의 미동도 없어 보였다.  어둠속에서, 휭하니 비어 있는 운동장 한 구석에 파묻혀 있는 그의 모습은 나를 더더욱 가슴저미게 한다.

  나는 조용히 떨리는 몸을 가누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제서야 인기척을 느꼈는지 그는 내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리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마워. 나와 줘서..."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하는데 눈언저리가 먼저 뜨거워 진다.

  "처음엔 착각이거니 했어. 그래... 10년전...  내가 아는 어떤 여자아이를 많이 닮았구나 했지. 그러나 내 시야에 들어오는 이는 바로 10년전 이 정은... 내가 소중히 여겼던... 내 친 동생보다도 더 귀히 여겼던 사람이었다. 놀랬어. 당황스러웠구... 특히나 내 사촌동생과..."

  나는 다리에 맥이 풀려 도저히 서 있을 수 없었다. 천근만근 느껴지는 쓸모없는 몸둥아리를 벤치에 실었다.

  "...오...빠는 변하지 않은거 같네요."

 그의 얼굴을 가까이 보고 싶다는 충동이 너무나 강하게 내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어둠이 짙게 깔린 운동장 바닥만 내려다 볼뿐...

  "10년이란 시간속에서 그대로 일 리 없겠지.  근데 정은이 넌 정말 변하지 않았어. 사실 널 다시 만나게 된다 해도 알아볼수 없을 거라 생각했거든. 여전하구나. 내 앞에서 수줍게 고개 떨구고 있는 그 모습..."

  아... 죽을때까지 오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거라 생각했죠...

  "나... 지금 가장 궁금한게 있는데..."

  나도 오빠한테 궁금한게 많아요...

  "... 우석이랑 정말 어떤 관계지?"

  오빠... 하필...

  "..."

  "대답하기 곤란해?  이모는, 그러니까 우석이 어머니되는 분은 정은이를 며느리감으로 생각하시던데... 우석이도 그렇구... 난 정은이의 대답이 듣고 싶어. 말해줄래?"

  "... 오빠... 내 대답이 어떻든 그건 중요치 않아요. 단지..."

  "아니, 중요해."

  ......

  "난... 난 10년간의 기다림을 헛수고로 만들고 싶지 않아. 그리고 10년간의 그리움을 싸구려로 전락시키고 싶지도 안구... 난 앞으로도 10년전 내가 겪었던 그 모든 일들을 애틋한 감정으로 기억되게 하고 싶어. 그래서 정은이 네 대답이 필요해."

        아... 주여... 어찌하오리까...

  찬바람에 얼얼해진 뺨을 타고 뜨거운 액체가 흐르기 시작했다.  일부러 닦으려 하지 않았다. 아니, 끊임없이 흘러 내려 닦을 수가 없었다. 내 손등은 촉촉히 젖어오고 있었다.

  "오빠... 나..."

  그는 이미 흥건히 젖어버린 나의 손을 움켜 쥐었다.

  "아냐. 말하지마. 아무... 아무말도 필요치 않아.

  매이는 듯한 목소리로 그는 황급히 나의 입을 막아버렸다.

  "미안해... 널 괴롭힐 생각은 추호도 없어. 널... 슬프게 하고 싶지 않다. 널..."

  그는 등을  돌린채 어둠을 향했다. 그의 어깨도 흔들리고 있었다.

  괴로와 하는 그의 신음소리들...

  어둠은 더욱 짙어지고 휭하니 비어버린 운동장은 더더욱 슬픔속에 묻혀간다. 차가운 바람만이 우리 곁을 맴돌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온몸이 뻗뻗해오기 시작한다.

  "춥다. 그지?"

  이 민주는 그의 웃옷을 벗어 나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비록... 지금 우리가 놓인 상황이 좋지 않다 하더라도... 난... 실망하고 싶지 않다. 하루아침에 무시해버리기엔 10년이란 시간의 갭이 너무 크겠지만... 그러나 점차 나아질 거야. 이제 우린 성인이니까..."

  그는 나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렇게 그와의 슬픈 재회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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