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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끼리도 말 못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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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속으로(7부)


BY 로렐라이 2003-09-20

  7부

 

  그렇게 시간은 우리곁을 눈 깜작할 사이에 지나가 버리고 있었다.

  8월... 9월... 중간고사도 치뤘다. 어떻게 지냈는 지 모를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간혹 지은이의 시샘하는 듯한 눈초리에 미안도 했고, 몇몇 다른 강의시간을 제외하곤 항상 C.C로 통할 정도로 안 우석과 나는 가깝게 지냈다. 아니, 늘 붙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10월 중순이 되었다.

  "아~ 지루해. 어떻게 저렇게 강의를 할까... 졸려서 혼났네. 와~ 우석씨는 옆에 정은이가 있어 그런가 지루한 모습이 아니네..."

  지은이의 장난기 어린 소리가 항상 우릴 즐겁게 해주곤 한다.

  "지은씨도 빨리 짝을 찾아봐요. 그럼 아마도 이 시간이 지겹게 느껴지지 않을 걸~ 하하하..."

  "치~ 그래요. 말나온 김에 그럼 나 친구하나 소개 시켜줘요. 어때요? 중간고사도 끝났겠다 이제 기말만 보면 2학년도 끝인데 주위에 소개시켜 줄 만한 사람 없어요?"

  "그래. 우석씨 주변에 친구들 많이 있잖아요. 지은이 외기러기 신세좀 면하게 해줘요."

  "뭐? 외기러기? 어휴. 야 너도 한학기 전만 해도 외기러기였다.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더니... 으으으..."

  "훗... 알았어요. 이번 주말 어때요? 친구보다 좀더 확실한 사람 소개 시켜 줄께요. 우리 사춘형인데 ㅅ대 졸업해서 지금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밟고 있는 사람이예요. 음... 우리 형이 약간 아깝~ 다기 보다~ 훗. 어쨋든 정은이랑 둘도 없는 친구니까 내 다리 한번 놔 볼께요. "

  "와~ 대학원생이라니... 그럼 나이가 얼마야. 정말 이럴꺼예요?"

  "아니, 아니. 그치 않아요. 홀어머니에 아들이 그 형 하나라 군데를 면제받았어요. 나이 차이래봐야 겨우 5살 차인데 뭐. 그리구 처음부터 결혼상대로 만나는 것도 아니니까 너무 부담갖을 필요 없구요. 그 형 여동생이 정은이, 지은씨랑 동갑일껄. 아마 지은씨 만나면 동생처럼 무지 잘 해줄꺼예요. 어때요? 하는거죠? "

  "지은아 한번 해봐."

  "글쎄 밑져야 본전이니까 OK. 근데 어떤 사람이예요? 음... 성격이랄까... 뭐 그런거 말예요. 그 나이에 아직도 싱글이라면 뭔가 문제 있는거 아닌가?"

  "한마디로 천사같은 사람이예요.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내 기억에 없어요. 항상 무언가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듯 한게 좀 그렇긴 해도 사실 그런 좋은 머리 갖고 있는 사람들이 또 그렇잖아요. 그리구 하나 확실한건  그 형 주변에 그 형 좋다고 쫓아다니는 여자들도 꽤 있었구 중매자리도 심심치 않게 들어온다는데 도대체 요지부동이예요.  정말이지 요즘 사람치곤 대단히 보기드문 남자예요. 그래두 내가 소개시키는 사람한테야 ..."

  "아... 비운의 남자라 이거죠. 좋아요. 꼭 만나게 해줘야 해요. 꼭~ ...야!  이 정은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이 중요한 시점에. 감명받았니? 훗~ 이젠 니가 날 부러워 할꺼다. "

  왠지 내가 전부터 알아왔던 사람과 비슷한 점이 많다는 착각속에 누군가가 자꾸 나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한다.

  " 정은아 정신차려. 너랑 그 형과는 친척지간이 될거야. 이거 참~"

  "무슨 소리. 그냥... 그냥 딴 생각 좀 하느라..."

  그렇지 않겠지... 그렇지 않을거야... 아무리 세상이 좁기로 안 우석의 사촌 형이라니.. 말도 안되는 생각이지.

  "자, 그럼 난 이제 사라져 줄테니까 좋은 시간 가져요. 약속 꼭 지키고.. 안녕~"

  이제 안 우석과 나, 둘만 남았다.

  "정은아 오늘 우리집에 안갈래?"

  "왜? 무슨 일 있어요?"

  " 응~ 아니 별일은 아니고 그냥... 어때? 그다지 갈만한 곳도 없구 날도 썰렁한데 집에가서 차한잔 하면서 책도 보고 그러지 뭐."

  "글쎄... 우석씨 부모님도 계실텐데 내가 어렵잖아. 다음에... 다음에 가요. 응?"

  "아냐. 아버진 당연히 안 계실테고 어머닌 동창모임이 있으시다고 나가신댔으니까 동생밖에 없을꺼야. 자 가자. "

  항상 그는 나에게 통보하는 식이었다. 물론 나를 아끼고 존중해 주지만 자신이 무언가 하고 싶은것이 있을땐 내게 동의를 구하기 보다는 과감한 행동으로 날 당혹스럽게 한다. 가끔은 그런 그의 성격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런 그의 결단력있는 행동이 좋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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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번잡한 시가지를 지나 한적한 주택가로 접어들었다. 왠지 집까지 간다는게 꺼려지긴 했지만 그다지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언젠가는 찾아뵈어야 할 분들이 계신 곳이니까...

  그의 집은 초록색 대문을 갖고 있었다. 정원도 꽤 넓었다. 잘 다듬어 놓은 정원 한가운데에는 간이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었다. 어느새 커다란 개가  우리곁에 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 개는 처음 온 나를 수상한 듯 자꾸 킁킁거리며 얼굴을 디민다.

  "메리. 잘 있었냐? 자식. 내 애인이다. 수상해할 것 없어. 저리가."

  그는 그의 첫번째 가족에게 날 그렇게 소개했다. 애인이라고...

  집안은 꽤 조용했다. 누군가 금방 정리해 놓은 듯 아주 깔끔한 인상을 풍겼다. 비싼듯한 가구들이 고풍스러운 모습을 갖추고 구석구석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낯선 집에라도 온듯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우석씨. 뭐해요?"

  "응... 이쯤되면 나오시기로 했는데..."

  그 순간 거실 저편에 있는 방문이 열리며 홈드레스를 입은 그의 어머니인 듯한 분이 나오시는 것이었다. 안 계신다던 어머니의 출현에 당혹스러움을 감출수 없었다.

  "그래. 이제들 오니? 나 때문에 좀 놀랜 모양이네. 그건 그렇고 우석이가 반할 만도 했겠는데..."

  나는 그제서야 사태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좀 놀라서... 이 정은이라고 합니다. 우석씨한테 어머님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 나한테는 항상 정은이 이야기만 하더니 정은이 한테는 내 얘기만 하나보지. 그러니?"

  "어머니도 참... 정은아 미안해. 네가 하도 집에 오는걸 부담스러워 하는거 같으니까 그랬어."

  "자. 그만들 서 있고 다들 앉지. 오느라 힘들었죠. 자 먼저 차라도..."

  그의 어머닌 내게 대단히 자상하게 대해주셨다. 세심한 배려까지 아끼지 않으셨다. 

  "자주 놀러와요. 우리 집안은 딸이 귀하다 보니까 정은이가 내 딸처럼 느껴지네. 호호"

  "어머니, 딸이라뇨?"

  " 얘좀봐라. 벌써 한쪽으로 기우네. 며느리도 딸이야. 안그래요?"

  이미 안 우석의 집안에선 얘기가 다 끝난 모양이다. 나를 딸, 며느리.. 당신들이 놓고 싶은 자리에 마음대로 앉히니 말이다.

  우리는 2층으로 올라왔다. 그의 방 창문은 멋진 조경을 품고 있었다.

  아스라히 보이는 산, 오랜 세월 풍우를 견뎌낸 고목들이 간간히 보이고... 한마디로 지상과 천상의 조화로움을 축소해 놓은 듯 하다. 그의 말대로 새벽안개가 자욱히 끼었을 때, 그리고 석양이 질 무련엔 더더욱 넊을 잃으리라...

  "정은아 뭐해? 딴데 정신 팔지 말고 나한테좀 팔아 주라. 훗. 자 여기 앉아."

  그는 내게 의자를 권했다. 침대와 책상, 그리고 책장과 컴퓨터, 그리고 검도에 필요한 듯한 도구들이 방안을  돌아가며 메우고 있었다. 문득, 그의 책상위로 눈길이 갔다. 많이 본 사람이 사진틀 속에 박혀 있었다. 내가 학교 호숫가 벤치에 앉아 있는 모습의 사진과 서클 연주회때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다.

  "뭐야. 완전 스토커였네~"

  "훗~ 그만큼 넌 내게 중요한 사람이었구 앞으로도 그럴거야."

  그는 어느사이 내 등뒤로 다가와 어깨를 살며시 끌어 안았다. 향긋한 풀냄새 같은 것이 나의 코끝을 자극했다.   

  "좋은 냄새네... 음~ 향기롭다."

  "치, 냄새만?"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그의 어머니가 과일과 차를 가지고 들어 오셨다.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가 몰라. 자, 이것들 먹으면서 얘기들 하고 이따 다시 기숙사로 돌아갈꺼지? 엄만 지금 외출할 거니까 문단속 잘하고 가렴. 정은이 다음에 또 봐요."

  다시 방안은 안 우석과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머쓱한 분위기에 몸둘바를 몰라 책장쪽으로 다가갔다.

  "어쩔수 없이 문학소녀야. 마음대로 가져가서 봐. 나도 거기 있는 책들 다 보진 못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책들이야. 참 그건 그렇고, 우리 어머니 어땠어?"

  "맞아. 정말 이러기예요? 한마디 상의도 없이... 내가 당황하는 모습이 그리 재미있어요? 정말이지.."

  "미안, 정말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정식코스를 밟으려면 마냥 기다려야 할 것 같구... 그래서 어머니랑 짜고 일을 벌였지 뭐. 그래 어머니 첫인상은 어땠어?"

  "나보다 어머니가 날 어떻게 보셨을까를 궁금해해야 하는거 아녜요?"

  "아니. 어머닌 이미 정은일 사진으로만 보시고도 OK하셨다구. 더군다나 아들이 그렇게 사랑한다는데. 오늘 자리는 정은일 우리 어머니한테가 아니라 어머닐 정은이한테 선보인 거라구."

  "뭐... 좋았어요. 자상하시고 세심하게 배려해 주시고... 하지만 뭐..."

  "하지만 뭐라니? 다 좋다면 난 빨리 약혼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야."

  "우석씨 왜이래요? 훗훗. 아이처럼..."

   "아이라고 해도 좋아. 하지만 난 사실 요즘 정은이가 내게서 멀어져 가는 꿈을 꾸곤 해. 물론 꿈은 반대라곤 하지만 왠지 마음에 자꾸 걸려. 난 정은이한테 이미 내 마음을 충분히 보여준 것 같은데 아직 난 정은이 마음을 확실히 모르겠어.정말, 정말..."

  그는 진지하며 근심스러운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말해봐 나를 사랑하니?"

  "......"

  "정은아, 어서 어서 말해봐. 응?"

  "우석씨, 나 우석씨 좋아해요. 물론 우석씨는 지금 당장 내게 사랑한다는 말을 듣고 싶겠지만 그러나 솔직한 내 감정은 우석씨를 좋아한다는 거구 끌린다는 거예요. 그런 감정이 사랑인지는 모르겠어요."

  그는 날 세차게 끌어 안았다. 그리곤 격한 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래. 난 니 말대로 날 사랑한다고 말해주길 바래. 비록 깊이 사귄지 얼마 안 됐지만 그러나 우린 예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모냥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잖아. 그거면 충분해. 더이상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나에 대한 해바라기를 할 수 있을까... 이래서 우리집에 오는것도 꺼렸니?"

  "우석씨. 제발 내게 설익은 모습을 보이게 하지 말아줘요. 난 좀더 신중하고 싶을 뿐야. 아니 이건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야. 우리 모두를 위해서예요.  사랑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어 우리곁을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구요. 정말 우리 손에 꼭 쥐어질 수 있을 지... 난 왠지 자신이 없어요. "

  "내가... 내가 있잖아. 내가 널 지켜줄께. 어린왕자가 바람에게서 끝까지 꽃을 지키려 했던 것처럼 널 그 어느누구도 건드리지 못하게 지켜줄께."

  "훗~  꽃은 결국 지고 말았어요. 다시 피긴 했지만...로렐라이의 시 기억해요? 신들이 샘내겠어요."

  그는 나의 눈을 응시했다. 그의 눈은 너무나 정열적이었다. 계속 보고 있노라니 내 몸이 타들어 갈 것만 같다. 그는 이다지도 내게 갈구하건만...

  "정은아. 신들도 우릴 갈라놓지 못할 거야."

  그의 얼굴은 서서히 내게 다가왔다. 눈을 감아버렸다.

  왠지 눈을 뜨기가 두려웠다. 눈물이 날 것만 같다. 그에 대한 사랑이 이다지 흔들리는건, 자신감이 없는건 왤까?

  나 역시 안 우석에게 뿌듯한 기분을 갖게 하고 싶다. 그러나...

  "사랑해.. 사랑해. 정은아."

  그는 나의 닫혀진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 우석씨..."

  "사랑한다고 말해줘. 제발... 정은아 사랑해..."

  "아... 사..랑해. 아 .... 사랑해요."

  두마리의 불새는 서로의 몸을 부둥켜안고 더욱 뜨거운 화염속으로 몸을 던지고 있었다.

  타들어가는 듯한 불길 속으로... 휘황찬란한 불꽃이 튀기고 있었다. 색색가지의 아름다움속에서 두마리의 불새는 서로를 애타게 부르다 ...  드디어 하나가 된다.

  창밖은 이미 해가 기울고 있었다. 새빨간 노을이 하늘과 대지를 온통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나무도, 새들도, 구름도 모두 모두 빨간색으로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서서히, 아니 거의 움직임없는 석양은 오래토록 창턱을 넘실거렸고 어느덧 방안도 석양속으로 묻혀 버렸다.   

                                                                                     <계  속>